운명의 개척자 에드모니아 루이스
메리 에드모니아 루이스 (Mary Edmonia Lewis)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경력을 쌓은 미국인 조각가였다. 뉴욕에서 자유분방하게 태어난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이었다. 또한, 그녀는 미술계에서 조각가로 인정받은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많은 미국 예술가들은 자국에서 명성을 얻고 즐겼다.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그녀의 삶과 일, 사회가 그녀에게 가한 장애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녀가 세계적으로 인정받았는지를 이야기할 것이다.
에드모니아 루이스: 어린 시절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1844년 뉴욕 그린부쉬에서 흑인으로 태어났다. 그녀는 성인이 되었을 때 금광 채굴 덕분에 부자가 된 오빠가 있었다.
어린 에드모니아는 ‘신사’인 흑인의 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역시 흑인 여성으로, 오지브와 아프리카계 출신이었다.(오지브와는 체로키족, 나바호족과 함께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원주민 중 하나이다.)
에드모니아는 열 살 때 부모님을 여의었다. 그녀는 나중에 나이아가라 폭포 근처에서 오지브와 가족에 의해 양육되었다고 했다.
메리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성공한 오빠의 도움으로 오하이오에 있는 오벌린 대학에 입학했다. 그녀는 1860년부터 1863년까지 그곳에서 공부했고 특히 재능 있는 예술가로 부상했다.
그 기간 오벌린 캠퍼스에서 노예 폐지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에드모니아의 이후의 예술적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유로운 숲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배가 고플 때 물고기를 잡아서 나뭇가지를 자르고 불을 피우고 구워서 야외에서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사치이다.”
-에드모니아 루이스-
성공의 대가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존경받는 예술가가 되기 위해 수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 했다. 그녀는 오벌린 대학에서 백인 급우 두 명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썼다. 그리고, 그녀는 백인 폭도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했다. 루이스는 공격에서 회복했고, 이후 그녀에 대한 혐의가 취하된 후 보스턴으로 탈출했다.
보스턴에서 루이스는 폐지론자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William Lloyd Garrison)과 조각가 에드워드 A 브라켓(Edward A. Brackett)와 친구가 되었다. 루이스에게 조각하는 것을 가르쳤고 그녀의 스튜디오를 홍보하는 것을 도왔다.
1860년대 초에 루이스는 그녀의 작품으로 상을 받기 시작했고, 그래서 예술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개리슨, 존 브라운, 그리고 다른 폐지론자들을 대표하는 그녀의 점토와 석고 메달이 그녀의 온건한 상업적 성공에 작은 문을 열었다.
그 후, 루이스는 1864년 제54 매사추세츠 봉사 보병 연대장으로 사망한 남북전쟁 영웅 로버트 쇼(Robert Shaw) 대령의 흉상을 만들었다. 이 일 덕분에 그녀는 처음으로 상당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흉상을 판 후에 번 돈으로 그녀는 로마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로마가 이미 다양한 미국 국외 예술가들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로마로 이주하기로 했다. 여기에는 기회를 찾아 그 도시에 도착한 몇 명의 여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루이스와 로마에서의 삶
루이스는 이탈리아에서 예술가로 계속 일했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유산의 주제를 다루었으며, 부차적으로 그녀의 종교인 가톨릭을 다루었다.
그녀가 가장 찬사를 받은 작품 중 하나는 노예제도의 억압에서 벗어나고 있는 흑인 남녀를 묘사한 조각품인 프리 포에버(Free Forever 1867년)이다. 루이스는 또한 율리시스 S. 그랜트와 에이브러햄 링컨을 포함한 미국 대통령들의 흉상을 조각했다.
‘애로우 메이커'(The Arrow Maker, 1866년)에서 그녀의 유산과 관련된 또 다른 예를 감상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그녀의 토착적인 뿌리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 조각은 어린 딸에게 화살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아버지를 보여준다.
에드모니아 루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는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이라는 제목의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 작품이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100주년 박람회와 2년 후 시카고에서 전시되었을 때 비평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2톤짜리 조각품은 루이스가 엄청난 운송비를 지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코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그것을 보관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가 그녀가 죽은 후 수십 년 후에 그것을 재발견했다.
에드모니아 루이스: 마지막 몇 년간의 유산
어린 시절과 마찬가지로, 에드모니아 루이스의 마지막 해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우리는 그녀가 1890년대 후반까지 계속해서 그녀의 작품을 전시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또한 그녀가 로마의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방문을 받았으며 결혼도 하지 않았고 아이도 낳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녀의 생애 마지막 10년에 대한 정보는 거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루이스가 로마에서 마지막 해를 보냈다고 추측한다. 하지만 최근에 누군가가 그녀의 사망 서류를 발견했다. 그것은 그녀가 1907년 63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흑인 여성으로서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아 있는 동안 그녀의 일에 대한 갈채를 받았다. 그러나 그녀의 진정한 인정은 그녀가 죽은 후였고, 그때 미술계는 마침내 그녀의 멋진 작품에 굴복했다. 20세기 말에 루이스의 삶과 예술은 사후에 찬사를 받았고 그녀의 작품은 많은 곳에서 전시되었다.
에드모니아 루이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일부는 현재 스미스소니언 미술관과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영구 소장하고 있다. 그녀의 작품 중 일부는 클리블랜드 미술관과 하워드 대학교 미술관에서도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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