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의 심오한 초상, '더 웨일'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웨일'은 우울증과 인간관계를 까칠하게 그려낸다. 이번 글에서 '더 웨일'이 어떠한 영화인지 살펴보자.
우울증의 심오한 초상, '더 웨일'
Valeria Sabater

작성 및 확인 심리학자 Valeria Sabater.

마지막 업데이트: 07 4월, 2025

‘나를 삶의 일부로 받아줄 사람이 있을까?’라는 단순하면서도 파괴적인 대사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최근작인 ‘더 웨일’ 주인공이 자주 떠올리는 생각이다. ‘블랙 스완,’ ‘마더!’ ‘더 웨일’ 등 아로노프스키만큼 인간의 감정과 고통을 확연하게 표현하는 능숙한 감독은 거의 없다.

‘더 웨일’은 폐쇄된 공간을 배경으로 계속 우울함을 느끼게 하는 비극이다. 전반적으로 외로움과 슬픔이 깔려 있지만 그러한 감정적 황페함 속에서도 거구로 분장한 브랜든 프레이저의 순수한 시선이 부드러움을 느끼게 한다.

자포자기를 다룬 영화는 자신의 결정과 사회적 행동이 어떻게 극적인 상황으로 이어지는지 보여준다. 또한 수많은 외로운 가정을 이해하는 데 조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내 인생에서 잘한 일이 하나라도 있다는 걸 알아야겠어!”

-‘더 웨일’ 찰리의 대사-

'더 웨일' 부녀 관계
아버지의 실수는 영화 ‘더 웨일’의 주요 요소다.

실패에 대한 투박한 이야기, ‘더 웨일’

‘더 웨일’은 사무엘 D. 헌터의 연극이 원작이며 꾸준히 대중과 비평가의 인정을 받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메이크업 및 헤어스타일 부문, 여우조연상 등 여러 상을 차지했다. 특히 완전히 다른 외모와 목소리로 작품에 탁월한 감성을 더한 브랜드 프레이저의 복귀도 주목받았다.

프레이저가 연기한 온라인 수업을 하는 영어 교수, ‘찰리’병적인 비만으로 은둔 생활을 하며 피자, 프라이드치킨, 밀크셰이크, 감자튀김을 주식으로 먹는데 감독은 찰리의 병적인 행동을 자세히 묘사한다.

관객은 음식이 강제와 자기파괴를 조장할 수도 있으며 그러한 파괴적 행동과 초고도 비만이 어떻게 주인공을 외롭게 하는지 집중하게 된다.

육체와 고통의 감옥

찰리의 삶은 수업, 정크 푸드 먹기, 게이 포르노 보기와 유일한 친구이자 간호사인 리즈의 방문이 전부다. 찰리는 몇 년 전 남자 제자와 사랑에 빠져 아내와 딸을 버렸다.

그러나 파트너였던 제자가 자살한 충격과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찰리는 자멸의 길을 걷는다. 식사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몸은 고통을 가두는 감옥이 되어 죽음의 절벽에 서는데 오직 리즈만이 찰리가 의학적 도움을 구하도록 설득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적 비만인 사람처럼 사회적 당혹감과 거부에 대한 두려움으로 집에서 나가지 않는다.

구원을 위한 탐색

‘더 웨일’은 주인공의 일주일을 그린다. 찰리는 은유적으로 항상 창밖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새를 포함하여 성정체성에 편견이 있지만 영적 구원을 도우려는 선교사와 찰리를 VIP로 여기는 피자 배달부 등 여러 인물의 방문을 받는다.

또한 알코올 중독자인 전처처럼 주변 인물도 전부 면도칼처럼 힘겨운 어둠 속에 산다. 그중에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경멸로 가득 찬 십 대인 엘리도 있다.

리즈를 제외하고 찰리 주변 인물은 모두 불친절하며 감정적으로 관객을 더 숨 막히게 한다. 찰리는 다정하게 세상을 내려다보는 황량한 산 위의 거인을 상징하며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찰리의 자기 증오는 주변, 특히 딸을 대하는 부드러움과 대조된다. 엘리의 모난 성격을 탓하지 않고 무한한 애정을 베풀며 자신처럼 분노에 휩싸여 고립되지 않도록 딸을 구원하고 희망을 주려고 애쓴다.

찰리는 자신을 증오하고 경멸하는 딸, 엘리에게 여전히 좋은 사람이 될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더 웨일' 성적 지향
브렌든 프레이저의 연기는 우울증과 병적 비만으로 고통받는 인물에 대한 공감도를 높였다.

‘더 웨일’ 속 우울증의 은유

‘더 웨일’은 우울증의 형태를 층층이 추적하는 감성 서사다. 찰리는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에 관한 에세이에 집착하는데 저자는 영화 마지막에 공개된다.

멜빌은 저서에서 고래를 거대하고 슬프고 감정이 없는 생물로 묘사한다.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것은 엄청난 슬픔을 안고 외로운 바다를 헤엄치는 생물이 되는 것과 같다. 그 고통은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하고, 회피와 심연에 빠지고 싶은 욕망만 느끼게 한다.

그러나 대런 아로노프스키가 작품에서 신앙과 종교의 복잡성을 보여주기를 즐긴다. 성경에서 고래의 형상은 요나처럼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삼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찰리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한 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산다.

고래는 슬픔과 중대한 실패라는 껍질 아래 숨어서 자신을 파괴하는 모든 존재의 상징이다.

더 읽어보기: 시는 마음의 고통을 어떻게 덜어주는가

낙인찍힌 사람들에 대한 공감만으로는 부족

이 영화는 정신적 문제, 성욕, 비통함, 종교적 편협함, 양육 실수를 극명하게 반영하며 타인에게 진정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반성을 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힌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찰리의 성격을 공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서적 공감만으로는 상대를 이해하고 돕기에 충분하지 않다. 동정은 구원과 다르며 병적 비만의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해와 도움, 삶의 변화가 필요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우려면 타인의 고통을 방관하지 않아야 한다. 사회에는 우울한 바다를 혼자 유영하는 ‘찰리’들이 많다.


이 텍스트는 정보 제공 목적으로만 제공되며 전문가와의 상담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들면 전문가와 상의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