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하르트 바그너 : 고통받는 음악가의 삶

바그너의 작품은 음악계에 변혁을 일으켰으며, 20세기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무엇이 이 음악가를 독보적인 천재가 될 수 있게 했는지, 이 기사를 통해 그에 대해 더 알아보길 바란다!
리하르트 바그너 : 고통받는 음악가의 삶
Gema Sánchez Cuevas

검토 및 승인: 심리학자 Gema Sánchez Cuevas.

작성자: Camila Thomas

마지막 업데이트: 19 5월, 2023

리하르트 바그너는 음악계의 흐름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던 시대를 정의한 작곡가였다. 지금의 오케스트라 편곡법에서 바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선율과 화음에서 있어 사람들이 작곡하는 방법에 바그너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그의 사상, 이론 및 라이프 스타일은 찬사와 뿐만 아니라 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었다. 음악에 있어서 바그너의 오페라는 종종 음정이 심하게 희석되어 노래인지 구호인지 경계가 모호해기도 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우리를 영웅주의로 고통받는 세계로 안내한다. 그의 작품은 우리의 귀에 스며들어 무대 위에 펼쳐지는 이야기 속으로 초대한다.

리하르트 바그너 초년기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넉넉지 못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로시마 파츠는 제빵사의 딸이었고 그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경찰 서기관이었다. 바그너가 어렸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그 당시 전염병인 장티푸스로 인해 사망했다.

얼마 후, 그의 어머니는 루드비히 가이어와 결혼하여 바그너에게는 계부가 생기게 된다. 가이어는 배우, 가수이자 화가였으며 바그너의 인생 가장 초기에 예술적인 영향을 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가이어는 연극 회사와 함께 일하게 되면서, 그의 가족은 결국 드레스덴으로 이사하게 된다.

리하르트 바그너 : 고통받는 음악가의 삶 01

바그너는 1817년 드레스덴에 있는 학교 피체호프칸토어 칼 프리디히 슈미트에 다니기 시작한다. 1822년에는 드레스덴에 있는 십자 학교(Kreuzschule)에 다니기 시작한다. 그는 열네 살 때까지 그곳에서 공부했고 그곳에 있는 동안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거의 15세가 될 때까지 리하르트 가이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1828년 1월 21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니콜라이스 학교를 다니면서 그는 자신의 성을 친부의 성에 따라 바꾸게 된다.

그의 청소년기의 혹독함

바그너가 초기에 작곡한 곡의 다양성의 수만 보더라도 그가 고전을 포함하여 광범위한 장르를 작곡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33년 스물한 살이었던 그는 뷔르츠부르크 합창 감독 자리의 일을 받아들이면서 전문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 초기 단계에서 그의 모든 프로젝트는 저예산이었고 시골 출신 청중이 있을 뿐이었다. 그가 오케스트라 감독으로 있던 동안 첫 번째 오페라 작품인 오페라 요정들(Die Feen)을 완성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가 사망한 지 5년이 흐를 때까지 실제로 공연되지 않았다.

3년 후 바그너는 미나 플라너와 원치 않는 결혼을 하였고 몇 차례의 오페라 작품을 썼다. 그 당시 바그너는 보다 혁신적인 음악적 아이디어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일부 사람들은 심지어 바그너의 이론이 히틀러와 나치즘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며 그의 노래 중 일부는 여전히 이스라엘에서 금지되고 있다.

이 당시는 바그너에게는 특히 어두운 시기였다. 플라너와의 결혼은 어느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고, 재정 상태의 문제도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도박과 술에 중독되어 재정적으로 회복하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1839년 바그너의 막대한 부채 때문에 그는 파리로 도망치게 된다. 그는 3년 후인 1842년까지 독일로 돌아오지 않았지만, 파리에서 보낸 시간은 그의 완전한 실패로 볼 수 있다. 그곳에서 그는 단 한 작품도 공연으로 성사해내지 못했다. 바그너는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수정하여 자신의 작품화시키려고 하였지만, 그것으로는 많은 명성을 얻지 못했다.

작가로서의 리하르트 바그너

바그너는 훌륭한 작곡가일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글쓰기와 같은 다른 형태의 예술을 시도했다. 1840년에서 1842년 사이에 그의 가장 중요한 에세이의 일부가 될 책을 출판했다.

이 에세이들은 그의 인생 대부분 동안 탐구해온 역사적, 이론적 주제를 다뤘다. 바그너 또한 많은 작품을 쓴 저널리스트였으며, 독일의 신문사들을 통해 파리 음악 이벤트에 대한 수많은 논평을 실었다. 그는 또한 몇몇 ‘다큐멘터리’를 쓰기도 했다.

종교가 인공적으로 변질될 때, 예술은 이를 구원해야 할 의무가 있다. 예술은 종교가 말 그대로 참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이 실제로는 비유적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다. 예술은 그러한 상징을 이상화 할 수 있으며, 그 안에 포함된 심오한 진실을 밝힐 수 있다.

-리하르트 바그너-

그의 삶의 어떤 면에 있어서는 모호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의 자서전인 ‘나의 삶(Mein Leben)’과 불일치되는 부분이 꽤 많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그의 태생부터 그가 54세가 되기까지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매우 주관적인 책이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스스럼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그너의 삶이 실제로 어땠는지에 대해 확실하게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는 자신의 후원자인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가 요청에 따라 1865년 이 자서전을 쓰게 된다.

그의 모국으로의 귀향

그의 오페라 마이어베어의 공연 후, 바그너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공연이 끝난 며칠 후 왕립 오케스트라 감독, 프란체스코 모를라치가 사망하게 된다. 1843년 2월 2일 바그너는 그 직책을 맡게 된다. 이 직책은 그에게 정치적 명성을 가져다주고 운영력과 창의성이 혼합되면서 그가 전문가로서 거듭나게 해준다.

바그너의 예술적 관심은 그의 정치적 활동과 매우 빠르게 융합되었다. 그는 극장이 반동적인 사회를 위한 거울로써 작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첫 번째(극장)를 바꾸면서 두 번째(사회)를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바그너가 체제 전복적인 정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기이다.

바그너는 독일 민족주의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상 경향은 그의 오페라 줄거리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만들어낸 신화적 인물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시기 동안 그의 작품에서 가장 일반적인 주제 중 하나는 독일 식민지에 관해서였다.

나는 더 이상 바그너의 작품을 들을 수가 없다. 폴란드를 정복하려는 욕구가 느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디 앨런-

정치적 변화와 후원자로서의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

1849년 불안정한 정치적 기후는 드레스덴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바그너의 왕실 오케스트라 감독으로서의 경력은 끝이 나게 된다. 혁명 직후 바그너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서, 그는 스위스로 달아난다. 그는 11년 동안 망명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바그너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 음악계에서 일할 방법이 없었으며, 그의 작품을 공연할 기회가 적었던 만큼 그의 수입 또한 매우 적을 수밖에 없었다.

1864년 바그너는 그가 빚진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망쳐 마리아 펠트(취리히 인근)에서 살게 된다. 그의 작품을 경외하는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를 환대해줄 뿐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었다. 바그너는 그의 새로운 후원자에 힘입어 ‘충성의 행진’을 쓰게 된다.

1865년 그는 독일 뮌헨에서 지금 그의 고전작으로 알려진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했다. 1년 후 미나는 드레스덴에서 사망하고, 바그너는 제네바에 정착하게 된다. 왕의 재정 지원 덕분에 바그너는 비용 걱정 없이 오페라를 작업할 수 있었다.

바이로이트

몇 년 후 바그너는  ‘바그너 소사이어티’라는 극장을 구상하는데, 동일한 이름하에 축제를 열 수 있는 장소였다. 그리고 오늘날 실제로 존재하고 있기도 하다. 그는 59번째 생일에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첫 벽돌을 쌓기 시작한다. 그는 루드피히 2세의 지원으로 1874년 돈을 마련하여 건물을 완성하기 위해 독일 전역에서 일련의 콘서트를 조직한다.

그는 또한 바이로이트에서 ‘반프리드’라고 불리는 빌라를 지었다. 불행히도, 그 건물이 완성된지 몇 년 후에 극장은 많은 돈을 잃게 된다. 바그너는 그 손실을 상쇄시키기 위해 일련의 콘서트를 공연하게 된다. 이때 당시 그는 심장병으로 앓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의 생은 이미 오래 남지 않았었다.

리하르트 바그너: 죽음과 유산

리하르트 바그너는 1881년에서 1882년 사이에 여러 차례의 심장 마비를 겪었다. 1883년 2월 13일 이 명성의 작곡가는 베네치아에서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시신은 그의 빌라인 반프리드 정원에 묻혔다.

바그너의 4악장의 오페라인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의심할 여지없는 그의 걸작이다. 이는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이라는 4악장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다. 트리스탄과 이솔베,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로엔그린, 탄 호이저, 그리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함께 이 4악장 오페라까지 모두 바이로이트 캐논을 구성하고 있다.

1876 ​년까지는 이 캐논이 완전체 상태로 공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시점 이후부터 매년 독일 바이로이트에서 열리는 축제에서는 오페라의 캐논 전체가 공연되어오고 있다.

바그너를 폄하하는 사람들 만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많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의 열렬한 지원 덕분에 그가 이전의 어떤 극장보다 복잡하다고 할 수 있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극장’과 함께 그의 유산을 남길 수 있었다. 이 극장은 현재 그의 천재성과 시대 초월성을 계속해서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오직 그의 작품만을 공연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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