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난드 마젤란: 위대한 항해자의 생애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바다의 남자이자 여행자였다. 그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땅이 있다고 믿었다. 이제는 그의 이름을 딴 바다를 건넜을 때, 그는 거친 해협을 지난 후 마침내 마주친 잔잔한 바다를 보고 감탄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 위대한 항해자의 생애

마지막 업데이트: 30 10월, 2019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를 시도하고 지휘했던 인물이다. 당시에는 외부에서 무엇을 만날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를 가져야 했다. 그의 항해는 실로 엄청난 결실을 보았다.

2019년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이끄는 세계 일주를 떠난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직감적으로 길을 개척했다. 당대에는 남미의 대서양과 태평양 사이에 통로가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지만, 마젤란은 반드시 통로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교회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하지만 나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고 있소. 나는 달에서 지구의 그림자를 보았고 교회보다 그림자를 더 신뢰하기 때문이오.”

-페르디난드 마젤란-

비록 마젤란은 세계 일주를 완수하지 못했지만 거의 완수할 뻔했다. 결국 그를 저지한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대담한 모험으로 가득 찬 삶을 살고 난 그의 때아닌 죽음이었다.

배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유년기

마젤란은 1480년 포르투갈 포르토에서 태어났다. 그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상위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주로 작도법과 항해학을 공부했다. 공부를 전진하는 동안은 리스본에 살았다. 또한 어린 나이에 여행을 시작했다.

25살에 그는 인도로 갔다. 그는 그 후 수많은 여행을 떠났다. 그가 노예를 산 것 역시 여행을 하던 중이었는데, 한 노예는 말라카(Malacca)에서 온 엔리케(Enrique)였다.

많은 사람은 그가 결국 그 항해 하는 동안 유럽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실제로 마젤란이 아니라 이 사람이 세계 일주를 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다가 마젤란은 모로코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전투 중에 발을 다쳤다. 포르투갈로 돌아왔을 때 그는 마뉴엘 1세 국왕에게 호감을 잃었다.

그 긴장감 때문에 그는 스페인으로 떠났다. 한번은 카를로스 1세에게 인도행 항해를 허가하도록 설득했다.

위대한 항해

1519년 8월 10일,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항해를 시작했다. 그는 당시 다섯 척의 배를 거느리고 있었다. 트리니다드, 샌안토니오, 콘셉시온, 빅토리아, 산티아고였다. 그의 선원들은 27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는 아프리카의 북쪽 해안을 따라 시에라리온으로 갔다. 그 후, 그는 서쪽으로 향했고, 결국 지금의 리우데자네이루 해안으로 가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리오 데 라 플라타(Rio de la Plata)에 직면했는데 그는 실수로 그것이 자기가 기다리던 통로라고 착각했다.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는 몹시 실망했다.

마침내 그는 한겨울에 산줄리안 만으로 진출했다. 그는 선원들의 사기가 떨어졌기 때문에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그곳에서 정박하기로 했다.

배 선장들이 그를 상대로 반란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적시에 선원들을 다시 잡았고 부는 해고하고 나머지는 그들의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실현된 꿈

1520년 봄, 그들은 항해를 재개했고 마침내 오랫동안 꿈꾸던 루트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그 당시 사람들이 태평양이라고 불렀던 “남쪽 바다“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그 거대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엄청나게 고통스러웠지만 다른 쪽에서는 바다가 잔잔했다.

잔잔하다는 성질에서  ‘퍼시픽(Pacific)’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것이 사실 지구상에서 가장 격노한 바다라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마젤란이 바다가 그렇게 잔잔해 보이는 것을 보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고 말한다.

그 해협은 마젤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후에 그는 칠레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항해했다. 그런 다음, 마젤란과 선원들은 더 서쪽으로 향해 다시 바다로 나갔다.

바다

그의 마지막 업적

불행히도 일이 복잡해졌다. 선원들이 먹을 식량과 물이 고갈되고 있었다. 원정대의 역사가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는 이렇게 묘사했다.

“우리가 먹던 빵은 벌레들로 가득 찬 먼지구름으로 변해 있었다. 쥐 오줌이 가득해 견딜 수 없는 악취도 풍겼다. 우리가 마신 물은 고여서 악취가 났다.

우리가 배고픔으로 죽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돛대의 가죽 조각을 먹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국 도적의 섬(Island of Thieves), 현재 괌으로 알려진 섬에 도착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음식과 물을 비축할 수 있었다.

준비를 하면 다시 출발하여 또 다른 군도를 찾았는데, 이 군도는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기리기 위해 ‘필리핀’이라고 이름 지었다.

섬에 있는 원주민들은 선원들이 그곳에 정박하는 것을 반대했고, 그들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했다. 1521년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죽은 것은 이러한 전투 중 하나였다.

전 세계를 항해하는 위업은 살아남은 선원들이 완수해야 했다. 그는 죽음이 그의 일생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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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ribio-Medina, J. (1913). El Descubrimiento del Océano Pacífico: Vasco Núñez de Balboa, Fernando de Magallanes y sus Compañeros. Tomo II: Documentos Relativos a Núñez de Balboa. Santiago de Chile: Imprenta Universita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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