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바르 뭉크: 사랑과 죽음의 그림

에드바르 뭉크는 현대 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은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주로 영향을 미쳤는데, 그곳에서 그는 두 명의 가장 위대한 표현주의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에드바르 뭉크: 사랑과 죽음의 그림

마지막 업데이트: 20 3월, 2021

에드바르 뭉크, 오늘은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에드바르 뭉크는 노르웨이의 화가이자 판화가로, 그의 작품은 심리적 주제를 강하게 자아낸다.

19세기 후반의 상징주의 운동을 대표하는 화가인 뭉크는 20세기 초반 독일 표현주의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미술 전문가들은 그의 유명한 그림인 절규(1893년)를 현대 정신적 고통의 상징으로 여긴다.

에드바르 뭉크: 사랑과 죽음의 그림

에드바르 뭉크의 유년기 시절과 청년 시절

에드바르 뭉크는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 뢰텐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중산층에 속했지만, 가족이 모두 건강상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뭉크의 어머니는 그가 5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고, 14살에는 누나의 죽음까지 맞이해야 했다. 두 사람 모두 결핵으로 사망했다.

뭉크는 1885년 자신의 첫 번째 걸작인 ‘병든 아이’에서 이 주제를 재현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남동생도 그가 어릴 때 사망했다. 살아남은 유일한 여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에 걸렸다.

뭉크는 정식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어릴 때부터 그림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 그의 예술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요소는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으로, 지금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 지역 출신의 작가와 예술가의 모임이었다.

이러한 모임의 구성원들은 자유연애를 믿었고, 대체로 부르주아의 편협함에 반대했다. 크리스티아나 보헤미안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화가 중 한 명인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뭉크에게 지도와 격려를 해 준 인물이다.

뭉크는 일찍이 크리스티아나에 만연했던 자연주의적 미학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그가 26세에 파리로 여행을 떠난 후 프랑스 인상주의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후기 인상파 화가인 폴 고갱과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작품에 강한 영향을 받았다. 또한, 단순히 사물과 상황을 외부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 그 속에서 본 내적 통찰력을 표현하는 합성 예술가와 같은 야망을 품었다.

뭉크의 예술적 성숙

뭉크의 매우 독창적인 스타일은 1892년 무렵 확고해졌다. 이 시기에 새롭게 그린 그림에서 선을 부드럽고 구불구불하게 그리는 것은 현대 아르 누보와 유사했다.

그렇지만 뭉크는 선을 장식이 아닌 깊은 심리적 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의 그림 속에 담긴 폭력적인 감정, 색다른 이미지 그리고 특히 성에 대한 대담한 묘사는 깊은 논란을 일으켰다.

노르웨이 비평가들과 베를린에 있는 경쟁 인물들은 뭉크의 작업에 대해 분노를 표했는데, 이는 그가 전달하려는 의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이러한 사건은 뭉크가 베를린 예술가 연합의 초청으로 1892년 독일의 수도에서 여러 작품을 전시했을 때 일어났다.

또한 비평가들은 대부분 사람에게 미완성 작업으로 보이는 그의 획기적인 기술에 불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러한 악평은 그가 독일 전역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는 데 도움이 되었고, 그 이후로 그의 명성은 더 퍼져 나갔다.

뭉크는 1892~1895년까지는 주로 베를린에서 살았고, 1896~1897년에는 파리에 살다가 끊임없이 자주 거처를 옮겼다. 그러다 마침내 1910년 노르웨이에 정착했다.

사랑과 죽음의 그림 그리고 절규

뭉크가 남긴 작품의 중심에는 사랑과 죽음에 관한 그림 시리즈가 있다. 원래 핵심 작품은 1893년에 공개된 6개의 그림으로 구성되었지만, 전시될 무렵에는 22개의 작품으로 늘어났다. 시리즈의 첫 번째 전시회는 1902년 베를린 제체시온(독일 예술 운동)에서 ‘생의 프리즈’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뭉크는 이러한 그림을 계속해서 재구성하면서 한 작품이 팔리면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다. 따라서 대부분 같은 이미지를 바탕으로 한 여러 그림과 판화물이 있다.

‘생의 프리즈’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에 깊이 기반을 두고 있지만, 주제는 보편적이다. 그의 작품은 어떤 한 남성이나 여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남성과 여성에 관한 그림이다. 또한, 인간의 경험과 자연의 위대한 힘에 대한 주제를 말한다.

순서대로 본 일련의 작품은 사랑의 자각, 개화, 쇠퇴 그리고 뒤이어 이어지는 절망 및 죽음에 대한 함축적인 묘사를 보여 준다.

에드바르 뭉크: 사랑과 죽음의 그림
귀가하는 노동자들, 에드바르 뭉크

에드바르 뭉크: 절규

뭉크의 많은 그림에서 이미지의 힘은 밀실 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폐쇄된 공간과 불쑥 튀어나온 원근감으로 강화된다. 이처럼 극적인 원근법에 대한 한 가지 예시는 뭉크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절규에서 사용된다.

절규는 ‘자연 전체에서 울린 큰 비명’을 느끼고 들었던 놀라운 경험에서 영감을 받았다. 정자 또는 태아를 닮은 공황 상태에 빠진 생명체를 묘사하며, 그 윤곽선에는 피처럼 붉은 하늘의 회오리치는 선이 가득하다.

“나의 고통은 나 자신과 예술의 일부이다. 이들을 나와 구분할 수 없고, 이를 파괴하는 것은 나의 예술을 파괴하는 것이다. 나는 그 고통을 간직하고 싶다.”

-에드바르 뭉크-

이 그림에서 불안은 한없이 높은 수준으로 올라간다. 그림 속 불안은 궁극적으로 죽음에 대한 성찰과 실존주의의 근본이 되어야 할 텅 빈 의미와 관련이 있다.

절규의 첫 두 버전은 1893년부터 시작되었다. 1895년에는 다른 버전이 탄생했고, 4번째 버전은 1910년에 완성되었다.

에드바르 뭉크: 그의 인쇄 미술 작품

뭉크의 예술은 그가 살던 시대의 시와 극과 명백하게 유사한 점이 있었다. 또한 뭉크가 초상화를 그린 극작가였던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헨리크 입센의 작품과 흥미로운 비교를 할 수 있다.

뭉크의 인쇄 미술 대량 생산은 1894년에 시작되었다. 그의 인쇄 미술 작품은 판화, 석판화, 목판화로 구성되었다.

그에게 판화의 주된 매력은 자신의 메시지를 훨씬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판화를 통해 그는 실험의 기회를 넓힐 수 있었다.

인쇄 미술 표현 기법에 대한 부족한 정식 교육은 그를 매우 획기적인 기술로 이끌었던 요인이다.

많은 동시대 사람과 마찬가지로, 뭉크는 목판화의 사용에 있어 일본 전통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예를 들어 하나의 나무토막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인쇄하는 등 과정을 과감하게 간소화했다.

뭉크가 표현의 목적으로 실제 나뭇결을 사용한 기법은 특히 성공적인 실험으로 입증되었으며, 후대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뭉크의 말년

그는 우울증, 자살 충동과 관련된 알코올 중독으로 1905년부터 1909년 사이에 여러 차례 병원에 입원했다.

폭력적인 행위, 싸움, 공격적인 행위에 끊임없이 연루되었다. 다른 화가와의 싸움으로 인해 4년간 모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기도 했다. 그는 몇몇 작품에서 이러한 다툼을 묘사했다.

뭉크의 가치를 뒤늦게 인정한 노르웨이에서 그에게 의뢰하여 1909~1916년 동안 진행된 오슬로 대학의 벽화 작업은 특히 중요했다. 이때 그려진 벽화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은 우화적인 이미지가 옆에 그려진 거대한 태양 그림일 것이다.

그는 주로 1890년대의 작품을 통해 현대 미술의 후대 예술가들에게 남길 만한 신비롭고 위험한 심령의 힘을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평생 유대인이었던 뭉크는 당시 세력을 키워가던 유럽 나치의 탄압을 받은 예술가였다. 1937년 그의 작품은 유대인 예술적 퇴폐의 한 예시로 나치 정권의 ‘퇴폐 예술‘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질병, 광기, 죽음은  평생 나의 곁을 따라다닌 검은 천사들이었다.”

-에드바르 뭉크-

뭉크는 1944년 1월 23일 오슬로 근교의 에켈리에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재산과 모든 그림, 판화, 도화 등을 오슬로시에 기증했다.

오슬로시는 뭉크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1963년에 뭉크 미술관을 설립했다. 그의 최고 작품 중 다수는 오슬로 국립 미술관에 있다.

에드바르 뭉크: 사랑과 죽음의 그림
죽음의 투쟁, 뭉크

뭉크의 유산: 에드바르 뭉크

뭉크의 ‘정서적 본질’에 대한 집중은 때때로 형태의 과감한 간소화와 묘사적이기보다는 표현적인 색상의 사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모든 스타일은 여러 젊은 예술가와 특히 독일 표현주의를 이끄는 지지자들에게 채택되었다.

“내 몸은 썩어가지만, 그 위에서는 꽃이 핀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피어난 꽃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영원’이 아니면 무엇이랴 “

-에드바르 뭉크-

어쩌면 그가 후대 예술에 미친 가장 직접적이면서 공식적인 영향은 목판술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미술에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은 예술을 특히 인간 경험의 보편적인 측면을 다루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는 데 있다. 그의 작품은 급변하는 현시대의 불확실성에 직면한 개인의 전형적인 현대 상황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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