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성은 오만이 아니라 자존감의 언어
존엄성은 오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줄 수 없고, 쉽게 잃어서도 안되는 귀중한 보석과 같다. 존엄성은 자신의 자부심, 자신에 대한 존중, 그리고 건강이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날개가 부러질 때,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곳으로 가려고 하는 희망을 담아, 우리를 들어올려 주는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존엄성을 통해, 머리를 높이 들고, 우리의 세상을 다시 볼 수 있다.
이 존엄성이라는 말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에는, 어느 누구도 의문을 표하지 않으며, 할 이유도 없다.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작가, 에르네스토 사바토가 말했듯이, 지구의 세계화는, 예견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리라.
우리는 세계화를 눈앞에서 지켜보고 있다. 우리 사회는 하나가 되어가고 있는 만큼, 우리는 그만큼 많은 자유와, 기회, 권리를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존엄성은 오만이 아니라 자존감의 언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유의해야 할 재미있는 점이 있다. 많은 철학자, 사회 학자, 심리학자 및 작가들은 “존엄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을 만드는 방법을, 세계에 전하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의 강점을 연구하여, 우리가 지금 처한 환경에서 더 큰 만족을 찾고, 따라서 불평등한 사회에서 진정한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리학자, 외교관이자, 교육자인 로버트 W. 훌러와 같은 사람들은, 우리가 확실히 더 자주 듣게 된 말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바로 ‘서열주의’이다.
이 서열이란 존재로 인해, 우리는 일상에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나아가고 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인간관계에서건, 직장에서건)에게서 괴롭힘을 당하고, 성 차별주의와 엄격한 사회적 위계 질서에 빠지는, 현대 사회의 피해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모두, 우리 삶의 어떤 시점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고 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의한 학대 관계이든, 쇠퇴하는 직업에 의해서건, 우리는 이 존엄성의 상실로 인해, 큰 대가를 치루어야 한다.
우리의 변화를 요구하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오만이 아니라, 우리의 용기이다.
이시구로 가즈오의 위엄
작년, 일본 출신의 영국 작가 이시구로 카즈오(Kazuo Ishiguro)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로 인해, 대중은 그의 소설 중 하나인 “오늘의 유적”을 알게 되었으며, 특별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우습게도, 모든 사람이 그의 꼼꼼하면서도, 때로는 분노를 머금은 – 항상 훌륭한 책이지만 – 책을 통해서, 그 대표적인 주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남아있는 나날]을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로 간주할 수 있다. 연인들이 절대로 만질 수 없는, 비겁한 사랑과 벽에 대한 이야기.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 이외의 사람은 결코 눈에 들어오지 않는 편협함이 담겨 있다.
아마, 우리는 그것이 한 집과 그 주변 주민들, 집의 주인과 고용인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것이다. 주인공인 달링턴 경이, 나치와 어떻게 아이러니한 우정을 쌓는지, 그리고 자신의 조국을 어떻게 배신해나가는지, 그의 집사의 시선에서 서술해내고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것이 책의 마술이다. [남아있는 나날]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고 있다.
[남아있는 나날]과 인간의 존엄성
이야기의 화자이자, 주인공의 시선과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논하고 있다. 바로, 달링턴 경의 집사, 스티븐스를 통해서 말이다.
소설 전체에서는, 꾸준히 달링턴 경의 행동의 정당화를 시도하는 방어 기제들이 구석구석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자부심을 갖고, 존엄성을 갖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잔인한 모습일 뿐이다. 인간의 모습의 반영, 의심,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인식, 심지어 사랑에 대한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위대한 집사’의 모습이 무너질 때가 다가왔다. 저녁 식사 시간에, 달링턴 경의 손님 중 하나가, 집사에게 하층민의 무식함을 설명하고자 했다.
이것은 집사, 스티븐스의 정체성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다. 그 집사는 평생 존엄성 따위는 모르고 살았고, 고난을 겪은 사람을 위해 길을 비켜섰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진정한 사랑을 포기했었다.
우리의 존엄성을 찾아 키우는 방법
이야기의 관찰자, 그리고 심지어 독자조차도, 어떤 사람이 어떻게 조종당하고 있는지, 또는 우리의 눈이 자신의 비이성적인 행동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교한 자기 기만을 어떻게 활용하는지 즉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스티븐스와 비슷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우리의 그, 해롭고 지치는 인간관계인, 우리의 사랑을 위해 우리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붓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사랑 때문에,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의 자존감이 망가지는 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가치가 없는 질 낮은 일을 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당신에게는 당신의 삶과 존엄성이 있는데도, 이를 스스로 버리고 있다. 삶이란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당신이 삶의 잔혹함을, 자신도 모르게 깨닫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일어서야 한다. 우리가 이 글에서 누누히 말했듯이, 이것은 우리의 가치, 힘, 더 나은 삶을 누릴 권리, 우리가 원하고 필요로하는 것에 대한 가치를 모두, 기억하기 위한, 인간의 존엄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큰 소리로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고,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열기 위해, 문을 닫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정의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결코 오만함이 아니다.
당신의 개성을 잃지 말자. 결코 정당화 할 수 없는 억지 정당화를 멈추고, 우리의 훌륭한 인격을 잃게 만드는 악순환의 바퀴에 스스로를 얽매는 것을 그만두도록 하자.
우리 자신의 손과 용기로 행복을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