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쇠창살 너머의 우정

03 11월, 2019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2006년에 출판된 존 보인의 소설이다. 2008년, 마크 허만이 같은 이름으로 영화화하기도 했다. 영화와 책은 줄거리가 매우 다르지만, 이 글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대신, 우리는 이 작품의 주요 가치와, 그 반성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그래서 영화와 책은 모두 기준점으로 동등하게 작용하려 한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가장 부끄러운 한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잘 알고 있다시피,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배경이다. 다들 말하듯이, 이 시기는, 인류 전체가 잊어서는 안될 시기이다. 역사는 우리가 배우도록 하고, 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경고하기 때문이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이야기의 시작

우리는 지금, 나치 독일 시절의, 한 군인 집안을 보고 있다. 그들은 매우 뿌리깊은 가치관과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고, 최소한 가족 구성원들끼리는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 가족의 가장은, 히틀러의 군대의 고위 장교이다. 그의 ‘큰 노력’ 덕분에, 그는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가서 복무할 계획이다.

온 가족이 새 직장 근처로, 새 집이 될 곳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완전히 격리된 집으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서 매우 가깝다. 여기서 우리는 소설 속 인물들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 아이들:  주인공은 브루노, 장교 집안의 막내이다. 그 나이대의 모든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세상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하고, 단지 놀고 싶어하는 순수한 아이일 뿐이다. 그는 모험책을 읽기를 좋아하고, 탐험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레텔, 그의 누나가 있다. 처음에는 그녀의 방에는 여러 귀여운 인형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나치의 선전물이나, 프로파간다들로 채워나가게 된다.

그리고 브루노와 같은 나이의 소년, 슈미엘이 있다. 그 아이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수용소에 억압되어 살아가고 있다.

  • 부모: 브루노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고위 관리이자 장교이며,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그의 아내는 처음에는 남편이 착수하는, 그의 “노력”에 대해 많이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지의 상태가 영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어떻게 바뀌는지를 보게 된다. 어머니는 이윽고 남편의 의무의 의미를 알게 되고, 남편에 대한 그녀의 감정 또한 변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직업에 대해 역겨움과 혐오를 느끼게 된다.

  • 조부모: 그들은 아버지, 즉 장교의 부모이다. 할아버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치주의에 반대하며, 아들의 행동을 싫어한다.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소설 속의 두 소년의 분명한 대조

소설에서 보면, 슈미엘과 브루노는, 정확히 같은 날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다르다. 

브루노는 편안한 가정에서 살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고,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함께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지루해한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곳에서 매우 불쾌한 기분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왜 굳이 이사를 해서, 옛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슈미엘은 유대인이다. 이 때문에 그는 강제수용소에 갇혀버렸다. 결과적으로, 그의 걱정거리는, 브루노의 것과는 매우 다르다. 하지만 그에게서도, 우리는 아이들의 같은 욕망과, 순수함, 순진함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조적인 현실은, 우리의 기원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낙인찍고,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하게 만드는지를, 처절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도 태어날 곳을 선택하지 않고, 할 수도 없다. 아무도 유아용 침대에서 새근새근 자는 저 아이를 탓할 수는 없다.

 두 소년은 이 현실적 차이와 낙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서로를 동등한 한 아이이자, 한 사람으로서 본다. 그들은 같이 놀고 싶고, 같이 모험을 즐길 친구를 찾고 있다. 왜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쇠창살이 있는지, 왜 같이 놀 수 없는지, 우리 두 사람은 같은 날에 태어났고, 같은 아이일 뿐인데, 왜 이렇게 다른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 경우, 두 아이 사이의 장벽은 현실이지만, 그에 대한 상징으로 볼 수도 있다. 같은 날에 태어난 두 소년, 서로 비슷한 두 소년, 하지만 두 개의 매우 다른 현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전세계는 나치를 금기시되는 존재이자, 혐오스러운 존재로 바라본다. 그러나, 어쩌면, 브루노는, ‘운이 좋은 아이’였는지도 모른다. 최소한 슈미엘보다는 ‘운이 좋은 곳’에서,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러한 장벽, 대조되는 현실이, 여전히 공공연하게 우리 삶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진국과, 개발 도상국, 재벌가의 아이와 빈민가의 아이의 환경의 차이를 보자. 차마,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창살

니체의 ‘초인 ‘에 대한 아이디어와의 관계

나치주의는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재발명한 것이다. 니체는 강하고, 지적이며, 창조적이며, 스스로 사고하고, 추론할 수 있는, 우수한 특성을 지닌, 인간 계급이 있다고 믿었다.

이 사람들은 생존자들이었다. 나치는 독일의 아리아인과 이 생존자들을 동일시했다.

그러나 니체에게는, 이 ‘초인’의 지위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단계가 있었다고 여겼다.

  • 낙타. 순종과 우리가 지어야하는 짐, 책임을 나타낸다.
  • 사자. 낙타는 일단 낙타가 되고자 하지 않으면, 사자가 된다. 이것은 부담, 반역, 전통적 가치에 대한 거부로부터의 자유를 나타내고 있다.
  • 아이. 그것은 변이의 마지막 단계를 나타낸다. 아이는 편견과 확립된 가치에 소속된 존재가 아니다. 아이는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사람이다. 거의 게임처럼, 아이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위의 이미지를 브루노와 슈미엘에게 적용시켜보자. 두 아이 모두, 편견이란 것이 없거나 다소 자유로운 아이이다. 그들은 모든 어른들에게 주어진 모든 장애물을 넘어설 수 있었던, 유이한 아이들이다.

일단 그들이 벽을 넘어서면, 그들은 확립된 가치에 도전한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쳤건 아무 상관없다.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더욱 깊어진다.

브루노는 스스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고, 자신과 슈미엘을 동등하게 만든다. 이 소년들에게는, 그들의 우정이 모든 것이고, 두 사람에게는 아무 차이도 없다고 여긴다.

대신, 그들은 서로를 알게 되면서, 서로에 대한 판단을 스스로 내리게 된다. 그들 스스로는, 무에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가치들로부터, 그들은 스스로 결정한다. 

“우린 원래, 너와, 난 친구가 되어서는 안돼. 우리는 본래 적이야. 알고 있었어?” – 브루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생각의 무게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특정 이데올로기와, 이를 형성하는 생각에서 이어질 수 있는 나비 효과와 같은 문제점을 깊이 지적하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영화에서도, 우리는 생각이란 것이, 어떻게 간접적으로, 세상의 그 어떤 무기보다도 훨씬 해를 입힐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볼 수 있다.

우리가 힘을 모을 때에, 우리가 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의 사람들의 신념은, 그 어떤 행동도 저지를 수 있다. 그게 얼마나 부정하고 잔혹해보이는지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다.

영원히 지속될 소중한 생각을 얻기 위해서는,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다. 그레텔과 브루노가 받는 수업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교사는, 나치 이데올로기의 가르침에 따라, 독일의 역사를 가르친다.

본질적으로, 그는 올바른 것으로 간주되는 ‘가치‘를 아이들에게 전달한다. 그래서, 독일인과 아리아인이 우월한 인종 또는 특권 인종에 속한다는 생각은, 자칫하면 대대로 이어질 뻔했다.

나치에 대한 선전과 프로파간다도, 매우 흥미롭다. 우리는 그레텔이, 처음의 귀여운 인형들에서, 어느새 나치의 프로파간다 선전물로 가득 바꿔 채워나가는 것을 보고, 여러 감정을 느끼게 된다.

소녀

우리는 이미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날씨를 단서로, 결말을 예상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복선이라 할 수 있다. 비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결말은 우리를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될 때까지, 타인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다른 사람의 고통을 체감하게 된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 의식할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물론 역사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의 역사는, 공포와 인간의 잔인함으로 가득하지만,  그 때문에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가정의 안락함 대문에, 우리는 많이 바뀌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알지 못한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오래 전에 일어났고, 그런 일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세대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 존 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