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가치가 신성한 가치로 자리 잡을 때
사람은 모두 자신에게 중요한 사고나 사물이 있다. 이 중 일부는 자신에게 너무 중요한 나머지 이에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치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서 중요성을 부여받으면, 그 ‘가치’는 더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사람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수량화하거나 교환하는 하는건 어렵다. 우리는 이를 정의가 어려운 무형의 가치 혹은 신성한 가치라고 부른다.
하나의 가치가 신성한 가치로 자리 잡을 때
사람의 신성한 가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존중하고 보호받아야 한다. 무언가가 신성한 가치가 될 때, 이는 또한 우리가 도덕적 책임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가치는 다른 가치와 비교할 수 없다. 즉, 유형 또는 무형의 상품에 대한 가치로 교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성한 가치는 어떻게 형성될까?
물건이나 사고가 신성한 가치가 될 수 있는 데에는 많은 방법이 있다. 이에는 두 가지 과정이 있다. 먼저 큰 집단에 신성한 가치가 자리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집단으로 인해서 그 가치가 더 신성함이 더해지는 것이다. 두 프로세스 모두 ‘위협’을 인식하면서 시작한다.
첫 번째 과정에서 ‘이상(ideal)’은 두 반대 집단 간의 논쟁으로 인해 위협될 수 있다. 이러한 위협을 느끼는 그룹은 그 이상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면서 그 가치를 엄숙한 의식으로 바꾸고 나중엔 신성한 가치로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는 세상을 ‘신성’과 ‘모독’ 두 가지로 나누게 된다. 동시에, 신성한 가치는 우리 집단의 구성원들과 우리를 결합하는 동시에 반대 집단으로부터 우리를 분리하게 된다.
반면에 두 번째 과정에서는 위협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의식을 거행하게 된다. 이러한 의식들은 신성한 가치와 관련이 있다. 그룹 구성원은 이러한 의식을 점점 더 자주 수행하게 되면서 그룹 구성원 간의 관계는 강화된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그룹의 규범을 만들게 된다.
신성한 가치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신성한 가치는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영향을 준다. 그 결정이 비생산적이거나 잘못되었더라도 우리의 신성한 가치에 위태롭게 되거나 반대하는 결정은 거부당하게 된다.
신성한 가치관은 행동 규칙을 수반하는 도덕적 신념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가 옳고 그른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성한 가치들을 맹렬히 지키며, 우리는 이를 지키기 위해 심리적 전략을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전략 중 일부는 도덕적인 분노와 정화를 포함한다.
도덕적인 분노는 자신의 신성한 가치와 모순되는 가치에 대한 인지적, 정서적, 행동적 회피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도덕적 정화는 신성한 가치에 대한 우리의 충실함을 재확인하는 상징적 행위를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신성한 가치의 이점
일반적으로 우리는 비용과 편익 중 한쪽에 무게를 싣는 결정을 내릴 때 특히 우리의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가 내리는 많은 결정들은 우리의 신념과 우리가 옳고 그른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 의해 좌우된다. 신성한 가치에 관해서도 이러한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때로는 우리의 의사 결정 과정에서 신성한 가치를 생략하는 것은 합리적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이에도 불구하고 신성한 가치관은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이점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신성한 가치를 팔 수 없다. 모든 것이 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저항 의식이 우리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더욱더 지탱해준다. 또한, 신성한 가치는 시간을 초월한다. 수천 년 전에 일어난 일과 관계없이 항상 중요시 여겨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성한 신념을 가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우리가 그 가치에 충실할 수 있게 해준다.
예루살렘, 신성한 가치로서의 의미
한 가지 예로서 예루살렘은 신성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이 고대 도시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현재까지 논쟁 중이다. 두 집단 모두에게 신성한 가치로서 자리 잡았다.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 모두가 예루살렘을 그들의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으로 보고있다. 예루살렘은 신성한 가치를 가지기에 돈으로 이를 주고 받을 수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수도로 예루살렘을 인정했을 때 그는 이를 ‘위협’한 셈이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신성한 가치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사고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는 폭력의 형태로 드러났다. 도널드 트럼프는 이 분쟁을 지속시켰다. 그가 분쟁을 해결하기 원했다면, 분명히 그의 선택은 이를 위한 해결책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다루기 어려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물질적인 혜택을 뒤로하고 잠재적으로 상징적인 한 발짝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 다른 그룹의 가치를 인식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