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기

메르세데스 소사는 놀라운 목소리를 가진 여성으로, 15살의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해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그녀는 정의와 인권을 위해 헌신했으며, 자신의 신념을 절대 저버리지 않았다.
'아메리카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기

마지막 업데이트: 28 5월, 2021

오늘은 ‘아메리카의 목소리’였던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기를 알아보려고 한다. 메르세데스 소사에게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기 힘든 두 번의 공연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73년 스페인에서 첫 번째 콘서트를 하던 중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다. 당시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독재로 통치되었으며, 콘서트 광고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일제히 모여 그녀의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고, 검은 여인이라는 의미의 ‘라 네그라’로 알려진 소사는 결국 무대에서 눈물을 흘렸다.

도저히 잊지 못할 두 번째 콘서트는 10년이 지난 1983년 2월에 열렸다. 쓰라린 망명 생활 끝에 자신의 고향인 아르헨티나에서 다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도 그녀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불렀고, 메르세데스는 관객을 쳐다볼 수조차 없었다고 고백했다. 관객과 눈이 마주쳤다면 도저히 눈물을 삼키지 못했을 것이다.

콘서트가 끝나고 나서 카를로스 알베르토 라코스테 제독은 “대체 누가 우리나라에 메르세데스 소사가 들어올 수 있도록 입국을 허가했는가?”라고 물었다는 소문이 있다.

‘아메리카의 목소리’인 메르세데스 소사는 변변치 않은 집안 출신의 여성으로, 부패한 권력에 직면했을 때 절대 타협하지 않아 일관성의 원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또한 전 세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하는 방식으로 노래를 불렀던 엄청난 목소리의 소유자였다.

'아메리카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기

메르세데스 소사, 수수한 여성

그녀의 본명은 아이데 메르세데스 소사였지만, 그녀의 부모는 소사의 이름이 ‘마르타 메르세데스’라는 데 동의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출생 신고를 하고 마지막 순간에 계획을 바꾸기로 했다. 그런데도 그녀의 가족은 평생 그녀를 ‘마르타’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는 1935년 7월 9일 아르헨티나 투구만주 산미겔투구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생년월일과 죽음을 둘러싼 두 가지의 흥미로운 점이 있다.

메르세데스는 아르헨티나의 독립 기념일에 태어났으며, 놀랍게도 독립 서명은 그녀의 고향에서 이루어졌다. 약 74년 후 라 네그라는 자신이 가수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비올레타 파라의 생일인 10월 4일에 사망했다.

소사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제당 공장 노동자와 부유한 가정의 빨래를 하며 생계를 꾸려나간 여성의 딸이었다. 그녀의 부모는 충실한 페론주의자였고, 1950년 10월 17일 아르헨티나의 기념일인 Loyalty Day를 기념하기 위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여행을 떠났다.

같은 날 노래 지도 교사가 학교에 결석하면서 그녀가 아르헨티나 국가를 부르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바로 이것이 그녀의 첫 공연이었다.

성공적인 커리어의 시작

학교 친구들은 그녀에게 당시 노래 경연 대회를 주최하고 있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가 볼 것을 권유했다. 메르세데스가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하면서 참가곡을 끝까지 불렀을 무렵 방송국 관계자는 이미 우승자가 결정되어 대회가 끝났다고 발표했다.

그 이후로 메르세데스는 라디오에서 정기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1957년 그녀는 민속 음악가인 아스카 마투스와 결혼하면서 그와 함께 자신이 매우 사랑하던 아르헨티나의 멘도사 지방으로 거처를 옮겼다.

얼마 후 그녀는 아들 파비안 마투스를 낳았다. 그리고 남편과 시인인 아르만두 테하다 고메스와 함께 누에바 칸시온 운동을 이끌었다.

8년간의 결혼 생활 끝에 그녀의 남편은 다른 여성을 만나 그녀의 곁을 떠났다. 메르세데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사를 하고 같은 해 거의 마법과도 같은 사건을 마주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인 코스킨 민속 페스티벌에서 음악가 호르헤 카프루네는 공식 초청을 받지 않은 소사를 무대 위로 초대했다. 그녀는 그 초대에 응해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불렀고, 관객들은 곧바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기

아메리카의 목소리, 메르세데스 소사의 전기

그 순간부터 메르세데스 소사의 성공은 단 한 번도 시들지 않았다. 모국인 아르헨티나에서 큰 인기를 얻은 뒤 라틴 아메리카 전체 그리고 전 세계를 정복했다.

소사는 뮤지션 대표였던 포초 마지텔리라는 새로운 사랑을 만났다.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그와 함께한 세월은 진정으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두 번째 남편을 인생의 ‘하나뿐인 사랑’이라고 불렀다.

아르헨티나의 군사 쿠데타 이후 소사는 어려운 시기를 겪었다. 처음에는 그녀의 음반이 금지곡으로 선정되고 독재 정부의 블랙 리스트에 올랐다.

1978년 라플라타에서 열린 리사이틀 도중 그녀의 공연 중 하나가 군대에 의해 중단되었다. 몇몇 경찰관은 그녀를 공개적으로 구타하고 그녀와 나머지 관객을 체포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녀는 처음에는 파리로, 그 후에는 마드리드로 망명했다.

망명은 그녀에게 쓰라린 경험이었다. 특히 동시에 두 번째 남편의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데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비록 남편을 떠나보냈지만, 자신의 노래와 관객이 보여준 존경으로 인해 삶에 대한 열정을 되찾았다.

다시 새로운 콘서트가 열리고 록 음악에 대한 실험도 시도했다. 그녀는 2009년 10월 4일 74세의 나이로 엄청난 커리어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목소리를 남긴 채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병원에서 목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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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raceli, R. E. (2003). Mercedes Sosa: la negra. Sudamer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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