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여성 참정권 운동

2019-11-27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여성 참정권 운동과 관련하여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으며 투표권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웠다. 이 글에서 에멀린의 삶과 정치적, 사회적 업적에 대해 자세히 배우게 될 것이다.

오늘은 정치운동가, 참정권 운동가의 삶과 업적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질 것이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기 위해 투쟁한 운동의 맨 앞에 섰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여성들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열정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녀는 평생 동안 여성의 참정권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싸웠고 가난과 무지를 뿌리뽑기 위해 싸웠다.

타임지는 에멀린 팽크허스트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100명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생각한다. 에멀린은 카리스마 있는 리더였고 재능 있는 연설가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싸움에 동참하도록 영감을 주었다

에멀린의 투쟁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그녀는 어떻게 미래 세대에 영향을 미쳤는가? 그녀는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현재를 변화시켰는가? 에멀린은 결국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켰다. 이 글에서 믿을 수 없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를 권한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 얼굴

에멀린의 초기의 삶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1858년 7월 15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로버트 굴든은 유서 깊은 정치 운동가 가문 출신이었고 어머니 소피아 크레인 역시 맨섬 출신의 정치운동가였다. 에멀린이 어린 소녀였을 때 그녀의 부모님은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운동을 지지했다.

20세 때 에멀린은 여성 참정권, 교육개혁에 찬성하는 변호사이자 정치운동가와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 팽크허스트였고, 에멀린보다 24살이나 많았다. 둘은 결혼해서 다섯 아이를 낳았다.

참정권

당대의 참정권 단체들은 독신 여성과 과부만 투표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에 굴복했다.

그러나 에멀린과 그녀의 남편은 그 제안을 완전히 거부하고 여성 프랜차이즈 리그라는 새로운 그룹을 시작했다.

이 새로운 운동은 모든 여성이 예외 없이 투표할 수 있는 권리와 이혼과 상속권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옹호했다. 그러나 조직 설립 직후, 그 운동은 극좌파로 급진화되었고 많은 회원들이 탈퇴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정치 경력

런던에서 잠시 머무른 후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맨체스터로 돌아갔다. 그때부터 에멀린은 스스로 정치적 활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에멀린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러 차례 거부당했다가 마침내 독립노동당에 입당하였다. 그 후 에멀린은 실업자 구제 위원회를 통해 식량을 배급하는 일에 관여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겪고 있는 가난과 무력감은 에멀린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경험은 에멀린이 노동자 보호 개혁 운동에 참여하도록 고무시켰다. 몇 번의 사건 후에 남편 리차드는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에멀린에게 상당한 빚을 지게 하고 가족을 책임지게 하고 떠났다.

에멀린은 시청에 취직하였고 그 지역의 여성 사회 상황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이제는 어른이 된 딸들도 참정권 운동에 가담했다.

말이 아닌 행동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정당과 참정권 단체에서 실망한 에멀린은 그런 단체들을 모두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 후, 여성사회정치연합(WSPU)을 설립했다. 이 조합은 여성들에게만 개방되었고 단체의 모토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었다.

WSPU가 과격화하고 폭력적인 전술을 사용하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들의 목표는 관심과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리창 깨기, 사유지에 대한 공격 그리고 감옥의 단식 투쟁을 대중화했다.

팽크허스트 당과 정부 당국은 한 차례 이상 에멀린 그리고 그녀와 뜻을 같이한 다른 사람들을 공격했다.

정부는 그녀를 여러 번 감금하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맨체스터에 있는 집을 팔았고 영국과 미국을 여행하며 자신의 일에 대한 회의를 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 사진 3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여성의 투표권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에멀린은 WSPU로부터 여성의 석방을 확보하기 위해 의회와 협상했다. 그 대가로 그녀는 더 이상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휴전을 약속했다. 이 합의에는 영국인 대 독일 투쟁을 지원하던 조직 출신 여성들의 지원도 포함됐다.

이 합의는 그 운동 내부에 갈등을 일으켰다. 그것은 사실 너무나 논란이 되어 에멀린과 그녀의 딸들 중 한 명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분열을 만들어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 좌파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실제로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당시 보수정당은 가장 인기 있는 정당이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그 에너지를 여성 참정권 운동에 쓰고 싶었다.

에멀린은 69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불과 몇 주 전에 자신의 헌신과 근면에 대한 노력의 결실을 보았다. 에멀린은 평생 여성들이 투표권을 얻는 것을 보기 위해 살았다.

여성 참정권의 폭력적인 면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논란이 많고, 활력이 넘치며, 급진적인 여성 운동가였다. 에멀린은 자신의 목표를 결코 놓치지 않고 일부 정치 사상을 공격하고 또 다른 사상을 선전했다. 사람들은 그녀를 싫어했지만 동시에 그녀를 사랑했다. 에멀린은 각계각층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결론적으로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여성의 참정권의 보다 급진적인 측면을 대변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폭력적인 방법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남성’ 전략들은 결국 여성들의 명분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감히 가부장제가 이해하는 것 같은 유일한 언어, 즉 폭력적인 항의를 말할 수 있었다. 당신이 그녀의 전술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즉 시스템이 듣고 변화했다는 것이다.

  • Cruz Pérez, G. (2012). De la tristeza a la depresión. Revista electrónica de psicología. Iztacala, 15(4), 1310-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