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한 마음은 슬픔이 된다

비겁한 마음은 슬픔이 된다

마지막 업데이트: 23 12월, 2017

비겁한 마음은 슬픔이 된다. 슬픔은 마치 우리 시대의 가장 두드러진 징후 중 하나가 된 듯하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우울증은 이제 고질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세계 보건 기구는 우울증 환자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발간해 왔는데, 이 보고서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을 정도다.

“우울증”이라는 꼬리표를 단 우리는 이제 거의 모든 형태의 슬픔이나 정서적 불편함을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제 우울증은 간단하게 견딜 수 있는 증상이고, 심지어 칭송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들 “우울”하다, 혹은 “오늘 밤은 우울하니까 외출하지 않을 것”이라

“겁쟁이들은 죽기 전에 여러 번 죽는다; 용감한 자들은 한번도 죽음의 맛을 느끼지 않는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만성 우울증과 정신 건강

이러한 우울증 유행의 이면에는 많은 논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울한 감정은 오로지 유전적 배경만이 존재하며, 그를 겪는 사람들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믿는다. 이로 인해 “x” 약을 먹으면 장땡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제약 회사들은 이러한 “전염병”의 위대한 수혜자였다.

슬픈 얼굴: 비겁한 마음은 슬픔이 된다

고대 시대에는 소극적이고, 슬픔에 사로잡힌 채로 갇혀 있고, 욕구 부족과 같은 감정 장애의 원인을 신체적인 “즐거움”의 부재라고 생각했다.

중세 시대에 이러한 만성의 슬픔은 “acedia”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고, 그 개념이 “Sloth(게으름)”의 개념으로 흡수되기 전까지는 인간의 7대 악 중 하나로 여겨졌다.

19세기에 정신과 의사 조셉 기슬레인(Joseph Guislain)은 영구적인 슬픔 상태를 ‘존재의 고통’으로 정의했다.

20세기에 정신 의학은 이 병을 “우울증”이라고 명명했고, 이것을 의욕 상실, 죄책감의 반복, 고뇌, 무관심, 자기 도취, 그리고 자기 도취의 상태로 특징 지어 지는 질환으로 정의내렸다.

만성적 슬픔을 도덕적으로 비겁함의 결과로 정의한 사람은 라칸(Lacan)이다. 비난하려는 의도가 아닌, 중요한 사실을 짚어주는 관점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본인의 슬픔에 대해 알아야만 하는 중요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해 고심하고 이해하는 방법은 늘 존재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을 알아내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슬픔과 비겁함

만성적인 슬픔을 겪고 있는 사람들은 강한 ‘가식’적인 감정을 겪는다. 마치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어느 장소에서 생명이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또한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떨어진 “망명자”의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마치 행성이 조용히 자전하며 존재하는 것처럼. 현재는 이질적으로, 미래는 새로운 고통의 징조로, 과거는 그 때 겪었던 슬픔을 반복하는 바퀴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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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는 한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질문과 대답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가 나락에 떨어뜨리는 행위다.

물론, 인생은 자체만으로 봤을 때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삶은 유의미하다’라고 말하는 책은 없다.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을 뻔했다는 말은 엄청난 오류다. 어쨌든 태어났고,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아까의 질문과 대답은 모두 사람의 책임감을 삭제하는 역할을 한다. “만약 삶에 아직까지도 그럴듯한 의미를 찾을 수 없다면, 나는 굳이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겠다.”라고 흔히들 말한다.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내가 열심히 살아야하나?”

이런 식으로 그들은 슬픔의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변해 버린다. 이것이 바로  도덕적 비겁함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슬픔이 자부심으로 바뀌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  이는 그들만의 “독특한” 정신 상태이며, 이런 감정으로 인해 스스로가 영원히 패배자로 남는 기분을 겪는다.

슬픔

비겁한 마음은 슬픔이 된다

물론 우리가 모두 같은 성격을 가지고 태어나진 않는다. 원치 않았던 아이거나, 가난하거나, 학대적인 가정 속에서 태어났거나, 다른 다양한 이유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선천적인 고통들로 인해 새로운 고통을 겪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각자가 처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책임이기 때문에 본인이 어떤 상황에서 태어났는지를 탓해봐야 소용이 없다. 본인의 삶을 부정해봐야 영원한 패배자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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