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사람이란 두려움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다
스페인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바르셀로나에서 발생한 테러 공격 이후, 스페인은 여전히 그 충격에서 회복 중이다. 바르셀로나의 사람들은 이념에 상관없이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일처럼 상실감과 상처를 느낀다. 또한 두려움도 느낀다.
사람들이 전한 여러 가지 메시지 중 하나가 나의 이목을 끌었다. 독창적이지도 않고 반복적인 메시지이지만 그래서 이목을 끌었던 듯하다. 그것은 ‘두렵지 않다’는 메시지였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은 이 메시지가 과연 사실일까 하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관광객에게 드리워져 있지 않은 감정일까?
나는 두렵다
두렵다는 모토는 우리가 아직 배우지 못한 감정을 순수히 보여준다. 감성 지능은 최근 유행 중인 ‘기사 제목’이다. 하지만 감성 지능을 우리 대화에 적용하는 것은 아직도 먼 일처럼 보인다. 감정을 적용한 대화만이 우리를 진정 보여주고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길이다.
두려움에 대해 알아보자. 나 자신도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나에게 바르셀로나에 발도 디디지 말라 하시는 할머니도 느끼고 계시는 감정이다.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되고, 예기치 못하고 피할 수 없으며 무작위적인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아름다운 장미 공원은 이제는 우리가 잊지 못하는 이미지와 사이렌 소리로 변해버렸다.
우리가 두려움을 인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 점에 대해서도 알아보자. 자신의 취약점을 보여주는 것은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어릴 때부터 이러한 행동은 약함의 상징이라고 들으며 자라왔다. 그래서 우리의 내면이 두려움을 느낄 때, 그리고 상처받기 쉽다고 느낄 때 공황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그 주위를 살금살금 걷고 두려움을 부정한다. 하지만 두려움을 부정하는 것이 정말 좋은 생각일까?
두려움을 부인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감정을 부정하는 것의 결과는 무엇일까? 두려운 감정은 우리가 인식한 분노나 짜증의 감정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두렵다는 감정에 더 큰 힘을 갖게 됨으로써 통제력을 잃기 시작하고, 우리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대해 무의미한 분노를 일으킨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종교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종교가 테러리즘과 연관을 갖게 되면서부터 이러한 경향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우리가 종교인을 무작위적으로 비난하게 만드는가? 그들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은 잔인함을 선호하는 일부 종교인에게 힘을 실어줄 뿐이다. 천국을 만들기 원하는 집단은 자신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사람들의 삶을 희생시키며 증식한다.
두려움을 무시하면 용기가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음으로써 보상받을 수 있는 그런 용기 말이다. 두려움은 테러리즘에 저항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시민들의 용기를 인식하게 해주고, 이 행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 또한 이해하도록 돕는다.
두려움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두려움을 인식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고 우리가 가진 불안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한다. 두려움을 부인함으로써 우리는 이런 기회를 놓치고, 우리의 감정과 분리되는 위험을 무릅쓴다.
테러 공격이 일어날 수 있다는 걱정에는 ‘적응성’이 존재한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조심하라고 말해준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준비하라고 말해준다. 위험을 인식하는 것은 다른 이들과 공감할 수 있게 해주고,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함께 느낌으로서 우리가 약한 것이 아니고,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감정을 부정하는 사람을 따라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할머니께 말했다. 할머니가 느끼는 두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말이다. 또한 걱정하지 말라고, 조심할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가 느끼는 감정대로 행동할 것이기 때문에 할머니는 걱정을 내려놓으실 수 있다. 두려움은 우리 모두에게 용감해질 기회를 주는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