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 숄: 하얀 장미로 히틀러에게 대항한 여인

2017-11-21

어려움은 용감한 사람을 만든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용감한 젊은 여인, 소피 숄 (Sophie Scholl)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왔다. 그녀를 알기 위해서는 히틀러의 독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소녀가 공포를 가지고, 그녀와 같은 시민에 대한 잔인하고 부당한 박해를 무시하는 대신 그 공포를 맞서기로 결정한 장소와 시간으로 말이다.

1943년 2월, “백장미단”이라는 대항 단체를 만든 다른 젊은이들과 함께 소피 또한 반역죄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흥미롭게도, 프랑스 혁명 자유적을 끝장내기 위해 만들어진 기구가, 자유가장 위대한 지지자 명의 삶을 끝낸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외부 세력이 들어올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를 손가락질하며 우리가 히틀러에 대항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소피 숄-

소피 숄: 그녀의 이야기

우리를 통해 수천 명의 사람이 깨어나 행동한다면 죽음이 무슨 대수랴,” 소피가 처형당하기 몇 시간 전 한 말이다. 소피는 당시 21세였다.

나치 정권이 그 사상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을 협박했던 제어와 억제에도 불구하고, 독일 내에서 나치를 맞서는 주저하지 않았던 작은 단체들이 있었다. 그들은 적은 자원과 더 적은 지지를 받았다.

소피 숄 흰 장미

그들은 정권이 법, 교육, 복지 또는 군대까지 제어할 수 있더라도, 결코 그들의 의지만은 꺾지 못할 이라고 결론 내렸다. 그들은 들켰을 때의 위험 부담과 그 대가를 알고 있었다. 바로 스스로의 목숨 말이다.

1937년에, 정권의 위험은 집 앞까지 들이닥쳤으며, 소피의 형제 몇 명과 친구들이 독일 유스의 일원이라는 이유로 불법으로 체포당했다. 이 즈음, 소피는 뮌헨 대학교에 입학해 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소명이 교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백장미단

모든 대항 운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의 주인공은 백장미단에 가입했다. 대학에서 다양한 국가 사회주의 집단의 모임에 참석한 뒤, 소피는 이 집단의 대담함에 끌렸다. 백장미단은 팜플렛과 벽의 그라피티를 통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적인 모임에서의 토론에 그치지 않고, 독일의 침묵이 히틀러가 주도하는 정권의 잔학한 행위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리려 지하에서부터 애썼다.

이미 단체에 소속되어 있었던 그녀의 오빠로 인해, 소피는 백장미단” 선전을 시작했다. 이런 물건을 지닌 상태로 발각되면 반역죄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늑대가면을 쓴 여인

마지막 순간까지 자유를 지키다

1943년 2월 18일, 소피는 학교 지붕에 올라가 팜플렛을 던지기로 결정했다. 나치 정권에 소속되어 있던 관리인 중 한 명이 그녀를 발견하고 신고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붙잡혀 투옥된 그녀에게, 게슈타포는 자신들의 동료 하나를 그녀와 같은 방에 들여보냈다. 목적은 단체를 해체하기 위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료는 소피에게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소피가 내뿜는 기운에 감탄하며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에 설득되고 말았다.

소피나 잡혀온 동료 중 그 누구도, 고문에도 불구하고 배신하지 않았다. 오늘날까지 백장미단은 자유의 상징이며, 다양한 학교, 거리, 공원, 광장 등이 숄 남매의 이름을 따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