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네카는 '불안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세네카는 '불안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마지막 업데이트: 02 12월, 2018

놀랍게도 사람들은 기독교가 탄생한 세네카의 시대부터 불안에 대해서 다뤄왔다. 당연히 당시엔 이를 심리학이라고 칭하지 않았고 과학의 한 분야로 연구하지도 않았다. 심리학자들은 없었지만,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동에 대해 관찰하고 공부하였다.

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들에 대한 대략적인 개요를 만들었다.

세네카는 힘든 시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그는 로마 제국의 모략과 부패의 시기에 공화국 원로 의원이었다. 그는 4명의 황제를 모셨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네로 황제이다.

그는 심지어 이 4명의 황제 중, 의심의 여지 없이 최악인, 네로 황제의 개인 교사이자 조언자였다.

또한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적 학파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었다. 이 학파의 사람들은 윤리와 관습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다지 통용되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된 ‘윤리의 타락’이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짧고, 잃는 것은 너무 많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우리가 얻은 삶은 짧지 않지만, 우리가 이를 더욱 짧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적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세네카-

세네카와 스토아 학파

스토아학파는 그리스에서 시작된 학파로 창시자는 키프로스의 제논이다. 스토아학파의 원칙은 초창기 기독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스토아학파가 주장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절제하는 삶이다. 그들은 “항상 더 많은 많은 것을 원한다면, 절대로 충분하다고 느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이라고 부르는 철학적 학파의 가장 중요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들은 무수히 많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가장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윤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물질적인 욕망을 버려야만 내면적인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논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이 행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토아학파는 인간은 자신의 기분에 따라서 행동할 뿐, 다른 것은 불가능하다는 당시의 생각을 거부했다. 그들은 그것을 수모와 고난의 원천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 통제를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논리에 근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악한 것은 없으며 무언가가 부정적으로 되는 것은 정도가 지나칠 때뿐이라고 주장했다.

세네카가 말하는 불안이란

훌륭한 스토아 지지자인 세네카는 도덕적인 삶을 사는 방법을 모색했다. 매우 지적이고 영리했던 세네카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천재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스토아학파에서 보낸 편지이다. 네로 황제가 떠나버린 세네카를 찾기 위해 그의 사람들을 보낸 후, 세네카는 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세네카는 많은 사람들이 지속적인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이러한 ‘지속적 걱정’을 ‘불안’이라고 부른다.

그는 “야생 동물들은 자신이 당면한 위험으로부터 도망치고 탈출하면 더 이상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는 물론,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도 동일한 고통을 받는다고 말했다.

위와 같은 세네카의 발언으로 심리학이 몇 세기가 지나서야 우리에게 알려준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불안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최악을 예상하는 감정이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나쁜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하게 만드는 주관적인 자각이다. 우리는 아직 벌어지지 않은 것들을 걱정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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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카3

세네카에게 배울 수 있는 것

세네카는 “우리는 과장하거나, 상상하거나, 예측하고 슬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아무런 이유도 없음에도 고통부터 받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언젠가 고통이 우리를 사로잡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는 것 만으로 말이다. 그럴 기미가 보이건, 아니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건 상관 없다.

그것이 바로 불안이다. 이는 ‘일어나지도 않은 고통을 상상하며 벌써부터 괴로워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미래로 인해 아픈 것’이라고 말한다. 미래를 보고, 언제나 최악의 상황만을 예상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훔쳐 갈 것이 없음에도 자신의 집에 도둑이 들 것을 걱정한다. 어느 순간 갑자기 지진으로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을 걱정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언젠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며 걱정한다.

종종 마음 속에 있는 생각이 현실이 되는 때가 있다.

우리가 예상한 것과 다른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과 우리 스스로 세워둔 ‘장애물’이 이러한 결과를 낳은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코 그것이 우리가 가진 세계관으로 비롯된 결과임을 알지 못한 채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 매우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가정해보자. 한 친구가 우리에게 그 ‘누군가’를 소개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따뜻하거나 친절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태도나 감정을 느낀 상대방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세네카가 하고자 한 말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준비할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흘러가도록 두고, 일어날 일이라면 그저 일어나도록 두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현재에 집중하며 살아가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걱정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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