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왕, 루이 14세의 생애

2019-06-04

태양의 왕으로 알려진 루이 14세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군주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집권 동안 프랑스는 전례 없는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루이 14세는 프랑스 루이 13세와 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앤 여왕의 아들이다. 루이 13세와 앤은 매우 오랜 세월 동안 아이를 가지기 원했고 그러던 중 드디어 1643년 5월 14일 루이 14세가 태어났다. 그는 루이-디외도네로 세례를 받았다. 오랜 세월 동안 아이를 기다려온 왕과 왕비에게 그의 출생은 하나의 축복으로 여겨졌다. 이것이 바로 그의 이름을 프랑스어로 “신의 선물”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유이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존재가 신의 선물이라고 믿으며 성장했다. 이 믿음은 그의 왕권 집행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이유는 젊은 왕 루이 14세는 왕에게 불복하는 것이 신에게 불복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주변에 있던 많은 사람들처럼 그는 자신의 명령이 신성한 것이라고 믿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루이 14세는 ‘태양의 왕‘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인류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왕 중 한 명이다. 그렇다면 그가 이토록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스스로 신성하다고 믿은 자신의 믿음은 그의 정치에 영향을 끼쳤을까? 이 글에서 전제 군주의 가장 완벽한 예시라고 할 수 있는 이 프랑스 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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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어린 시절

루이 14세는 4살에 프랑스의 왕이 되었다. 당시 프랑스 법에 따르면, 그 순간부터 이 소년 왕은 1900만 사람들의 몸과 재산의 주인이자 군주가 되어야 했다.

루이 14세는 당시 왕위를 이어받기에 명백하게 너무나 어렸다. 따라서 그의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앤은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추기경 쥘 마자랭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루이 14세가 충분히 혼자 정치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정치적 결정을 감독하도록 했다.

그의 선생들은 정치 및 경제 교육에 중심으로 그를 지도했다.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 그는 사고를 당해 거의 익사할 뻔한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가 어린 왕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루이 14세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상당한 역경을 겪으며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루이 14세가 성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는 것은 꽤나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루이 14세가 9살이 되었을 때, 프랑스 의회의 귀족들은 왕권과 재상 마자랭에게 대항했다. 이것이 바로 “프롱드의 난“이라고 알려진 기나긴 내전의 시작이었다. 이 시기 동안 루이 14세는 사람들의 조롱, 빈곤, 공포, 추위, 허기에 시달려야 했다.

이 전쟁은 군주의 성격을 바꾸어 놓았고 그의 생각과 행동을 변화시켰다. 그 결과, 루이 14세는 파리, 귀족 그리고 그들을 지지한 모든 사람들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마자랭은 결국 분쟁에서 승리했고 루이 14세가 그의 집권 동안 끝낼 경제 및 행정 개혁을 시작했다.

루이 14세는 추기경을 매우 깊이 존경했고 충분히 성인이 되어 왕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그에게 계속해서 재상의 자리를 지키도록 했다.

루이 14세는 외교관이자 군인으로서의 교육을 받았다. 그는 자신의 국가를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작용하는 나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닌 스페인의 왕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 이유이다.

그는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고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힘을 키우기 위해 정략 결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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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왕 집권의 시작: 마자랭 이후의 프랑스

마자랭의 사망 이후, 루이 14세는 모든 국가적 책임을 스스로 맡기로 했다.

이 결정은 그의 고문단 일부와 귀족 전체를 놀라게 했는데, 그 이유는 전통적으로 왕의 역할이 좀 더 사회적인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루이 14세는 자신이 가진 신성한 자격의 권리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위치를 프랑스의 절대 권력으로 굳히고자 했다.

그는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몇 세기 동안 이어진 굳건한 체제를 설립하기도 했다.

54년 동안 루이 14세는 자신의 왕국을 운영하기 위해 하루 10시간 씩 일했다. 그 어떤 사소한 일도 소홀하게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무엇도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신이 통제했다.

왕은 자신의 왕국의 가장 큰 약점이 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프롱드의 난이 일어났을 때처럼 쉽게 자신에게 등을 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귀족에게 도시 바깥쪽에 있는 그의 거대한 궁전, 베르사이유 궁전에 살 것을 명했다.

그들은 모두 계속해서 왕의 요구를 거절하려 했다.

모든 상황은 루이 14에게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하려는 계획을 세우는 경우, 그 정보를 바로 전달해줄 매우 많은 스파이들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중앙 집권제의 전형이었다. 또한, 매우 오랜 세월 동안 문화와 배움의 중심이었다.

태양의 왕 루이 14세: 군인 그리고 후원자

루이 14세는 예술의 지원자이자 후원자였다. 그는 영향력 있는 극작가 몰리에르와 같은 위대한 문학가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또한, 금석학, 문학 아카데미 및 왕립 음악 아카데미를 창립했다. 파리 천문대의 가장 큰 후원자이기도 했다.

물론, 루이 14세는 프랑스의 가장 중요한 예술가 대부분을 지원하고 후원했다. 이 예술가들은 바르세이유 궁전에서 노래와 연기를 하고 그림을 그렸다.

바르세이유 궁전의 정원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야외 예술 공간 중 하나일 것이다. 왕과 그의 궁전의 웅장함에도 불구하고 군주제는 점점 더 사람들과 예술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결국, 그것은 궁전 만의 생활로 격하되었다.

프랑스는 자립적인 국가였지만 그들의 왕은 타고난 군인이었다. 루이 14세는 홀랜드를 침공하기로 결정했고 과거 실패했던 프랑스의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스페인, 영국, 신성로마제국으로 이루어진 위대한 동맹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해당 전쟁으로 인해 프랑스는 너무 큰 영토를 잃지는 않았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매우 힘든 상황에 처해졌다. 재정이 무너지고 있었다.

루이 14세는 풍요로운 국가의 왕에서 빈곤에 찌든 약하고 끔찍한 땅의 왕이 되었다. 

루이 14세는 77세 생일이 지나고 며칠 후에 사망했다. 당시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당시 가장 장수한 왕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사망 이후, 왕위는 당시 5살이었던 부르고뉴 공작의 막내 아들에게 이어졌다.

루이 14세는 가장 위대한 왕이었고 사람들은 예술과 문화에 이바지한 그의 업적을 여전히 칭송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전제주의의 살아있는 화신이 되었다. 그는 사람의 운명과 천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구시대의 가치를 매우 굳은 인물이었다.

루이 14세는 자신의 국가에 화려함과 부를 가져왔지만 그것을 망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는 태양의 왕이자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왕으로 계속해서 기억될 것이다.

Lossky, A. (1994) Luis XIV y la monarquía Francesa. Nueva Jersey: Rutgers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