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들이여, 들어라! 강의 계획이 다가 아니다!
교사들이여,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확실히 우리 모두는 학생의 반감을 사고, 논쟁을 벌이는 교사를 겪은 적이 있다. 이들은 부족한 점이 많은 태도를 갖고 있고, 종종 자신이 가르쳐야 할 학생들과 오히려 똑같이 행동하기도 한다. 또 한편으로는 교실에 들어와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책만 읽는 교사도 있다. 모든 것을 다룰 시간이 없다고 말하면서 항상 서두르는 사람들도 있다.
역학은 똑같다. 어떤 학생들은 더 나아지고, 다른 학생들은 더 나빠진다. 하지만 그들의 목표는 오직 강의 계획대로 가르치는 것으로, 성적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이고 (높을수록 더 좋다), 학생들이 지식을 얻고 배우는 것을 바라면서, 엄청난 양의 숙제를 낸다. 이 모든 것 중에 잊은 것은 없는가?
“만약 나에게 말로 알려준다면 나는 그것을 잊을 것이고, 만약 나에게 보여준다면 나는 그것을 기억할 것이며, 나를 참여시킨다면 나는 그것을 배울 것이다.”
교사들이여, 강의 계획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교사의 유일한 바람은 강의 계획대로 가르치고, 모든 목표를 달성하고, 그 책을 끝내는 것이다. 이로 인해 그들이 얻는 것은젊은이들의 창의력을 파괴한다는 점이다. 모든 학생은 진정으로 배우는 것과 거리가 멀게, 가능한 많은 정보를 외우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보통은 다음 달이나 다음 주에 모두 잊어버린다.
이러한 점에 대해 많은 교사들이 불평을 한다. 그러나 그들 중 실제로 자신이 해온 방법이 옳은지 분석하고 신경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교사는 교실에 들어가는 순간, 자신의 일에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을 잊는 것 같다. 특히 십대를 다루는 경우가 그렇다. 괴롭힘이나 따돌림에 대한 보고서가 나오면, 해당 교사는 그것을 믿지 못하면서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런 일은 드문 일이 아니다. 교사들이 자신의 일과 자신의 학생들을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최고의 교사
하지만 많은 교사가 학생들에게 열정이나 영감을 전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물론 그렇지 않은 교사도 있다. 스페인 신문 엘 파이스(El País)에 2013년 8월 17일자 기사의 주인공이 된 카를로스 아로요(Carlos Arroyo)라고 불리는 남자에 대한 단편이 있다:
“내 인생 최고의 선생님은 돈 마누엘 벨로였다. 그는 내 고등학교 5학년 문학 선생님이었다 […]. 선생님은 내가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게 해 주었다.
거의 가르치는 것이 없는 질식할 듯한 환경에서 그 당시에는 그 학교에 교사가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이 많이 없었지만… 이 교사는, 놀랍도록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읽고 공부하기 위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었다.”
학생은 가르치는 교사에 따라서 수학을 좋아하게 되기도 하고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 또 다른 학생은 그의 작품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문학교사가 있었기 때문에 작가가 되려는 열정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른다. 교사가 학생의 자존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사는 학생을 변화시킬 수 있다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비판이 가정에서 아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교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만약 교사가 학생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학생들에게 동기부여를 하지 못한다면, 상황이 개선되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를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학생도 되어보았고(많은 교사가 자신이 학생이었던 시절을 잊는다), 중학교 교사로 일한 경험도 있다. 나의 지도교사가 다음과 같은 말로 그의 학생들을 멀리하는 것을 보았다: “그 아이와 함께 어떤 것을 해도 소용없어, 그 아이는 책을 열어 보지도 않아”.
나의 지도교사는 반항적인 십대들만 보았고, 물론 다른 학생보다 좀 더 나은 학생도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거의 대다수의 학생이 아주 멍청한 “작은 짐승들”이었다. 그 시각은 나의 시각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다. 나는 학생 모두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들 대부분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동기가 부족하며, 자존감이 낮은지 느낄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그들의 가정생활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내가 2달 동안 그 수업을 맡았을 때, 책을 펴지 않는다던 소년은 책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절대 무시하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도 않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었다. 그저 간단하게, 그가 책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수업을 한 방식과 전하려 했던 열정이 효과가 있었다. 심지어 학생은 교실 앞에 나와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를 하고 싶어 했다. 문제의 그 학생은 반 친구들이 발표를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 것인지 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발적으로 책을 펴고, 펜을 들고, 수업시간에 해야 할 것을 했다: 에세이를 쓴 것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나의 지도교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는 불가능한 것이 이루어졌다고 말했지만, 그저 내 생각이 그 소년의 생각과 함께한 것일 뿐이었다. 그가 쓴 글은 내가 내내 의심했던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문제가 있는 가정 환경에서 살았다. 불행하게도, 나는 거기서 계속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통해 나는 교사가 학생의 태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평범한 교사는 말한다. 좋은 교사는 설명한다. 훌륭한 교사는 증명한다. 진실로 위대한 교사는 영감을 준다.”
-윌리엄 A. 워드-
나의 지도교사는 학생들이 이사회에 참여하고, 그룹으로 운동을 하도록 하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은 강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시간을 빼앗긴다고 말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게 되었다: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학생이 재미있게 배우고, 반 친구들 앞에서 스스로 배우게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강의 계획을(학생들은 거의 기억도 못한다) 완성하고 창의성을 억누르는 것인가?
우리는 교실 안의 큰 변화가 필요하다. 이미 어떤 학교는 몬테소리 교육법을 이용하거나, 바르셀로나의 사다코 학교같이 개인 책상을 없애고, 공동학습과 정서적, 사회적, 철학적 교육을 기반으로 한 교육법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는 여전히 전통적인 모델로 운영되고 있다. 모두에게 효과가 없는 모델로 말이다. 강의 계획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