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자유의지론자의 전기

24 2월, 2020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작품은 특별한 마법으로 가득하다. 갈레아노는 역사가이지만 저널리즘과 시에도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작가들이 동시에 생각하고 느낄 권리가 있다고 믿었으며, 객관성의 개념을 거부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그의 이름은 훌륭한 문학 작품, 사회적 헌신 및 윤리와 동의어로 간주한다. 특히, 그의 책 라틴아메리카의 절개된 혈맥(Open Veins of Latin America)은 2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진정한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갈레아노를 어떤 한 장르에 귀속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의 글은 종종 현실과 소설, 느낌과 생각을 결합한다. 사실, 사람들은 그가 “감성적 용어(feel-thinking language)”라는 말을 발명했다고 믿고 있는데, 그는 이 감성적 용어를 객관성과 주관성의 특정한 조합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했다.

갈레아노에 관한 가장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그가 독학한 석학이라는 점이다. 그는 여러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공식적인 전문직 타이틀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 점에서 미뤄 볼 때, 그의 작품이 이토록 영향력 있는 이유는 아마도 그의 일상적 인식이 자신의 글에 영감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자유의지론자의 전기

몬테비데오의 한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1940년 9월 3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에두아르도 게르만 마리아 휴즈 갈레아노(Eduardo Germán María Hughes Galeano)였지만, 그는 어머니의 성만 사용했다. 그의 가족은 유복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어린 시절 갈레아노는 성자 또는 축구 선수 중 하나가 되는 꿈을 꿨다. 그러나 14살 때 그는 주간 신문 엘솔(El Sol)에 자신이 그린 만화 한 편을 가져갔다. 그 신문사는 그 만화가 너무 좋아서 그 자리에서 그의 만화를 샀고, 그렇게 갈레아노는 사회주의 만화가가 되었다.

하지만 19살 때 그는 실존적 위기를 느껴 자살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랬는지 정확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 그의 삶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 시기가 바로 그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로 활동한 때이며 그는 주간 잡지 마르카(Marcha)에 글을 싣기 시작했다.

망명 중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1973년 우루과이에는 군사 쿠테타가 일어났고 그 결과 끔찍한 독재 권력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 갈레아노는 체포된 다음 잠깐 투옥되었다가 아르헨티나로 탈출했다. 그리고 그는 32세라는 어린 나이에 라틴아메리카의 절개된 혈맥(Open Veins of Latin America)이라는 인기 있는 작품을 썼다. 그는 사실 정치 경제 관련 서적을 쓰고 싶어 했지만, 대신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아이콘이 된 이 열정적인 이야기를 썼다.

그 당시 갈레아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그는 주간지 크라이시스(Crisis)를 공동 창립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독재 정권은 1976년 아르헨티나를 또다시 점령했으며, 그 결과 갈레아노는 다시 도망가야 했다. 아르헨티나를 떠나기 직전 그는 바비큐 파티에서 헬레나 빌라그라(Helena Villagra)를 만났는데, 그녀는 갈레아노의 남은 40년 동안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의 독재 정권은 모두 갈레아노의 책을 금지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스페인으로 도망가서 유명한 불의 기억 3부작을 썼다.

그는 그리스 시에서 영감을 얻어 이 책을 쓰게 되었다. 이 이야기 중 몇 챕터는 그가 냅킨에 휘갈겨 썼던 내용이었다.

망명 중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우루과이 귀환

갈레아노는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1985년 마침내 우루과이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충실한 친구 마리오 베네데티(Mario Benedetti) 및 다른 지식인들과 함께 브레차(Brecha)라는 새로운 주간 잡지사를 창립했다. 그는 또한 몬테비데오에 있는 많은 시인의 카페 중 하나인 엘 브라실리오 카페의 단골이 되었다. 갈레아노는 항상 창문 옆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엘 브라실리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업하고 있으며 이 카페 메뉴 중 하나는 이 작가를 기리는 의미에서 “카페 갈레아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갈레아노는 좌파 정치인 및 지식인 그룹에도 다시 한번 참여했다. 그는 타바레 바스케스(Tabaré Vázquez)의 대통령 선거와 함께 우루과이에서의 첫 좌파 정치 승리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중에 그는 호세 무히카(Pepe Mujica)의 정권 장악을 축하하기도 했다.

그는 베네수엘라 TV 채널 텔레수르(Telesur)의 자문위원회 일원이 되었으며 멕시코 신문 라 요르나다(La Jornada)에 주간 칼럼을 기고했다.

하지만 2007년 의사들은 갈레아노를 폐암으로 진단했으며, 그래서 그는 공식 석상에서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갈레아노는 결코 새로운 기술을 믿지 않았으며 죽기 직전까지 손으로만 글을 썼다. 그는 극도의 합리성과 권위주의를 거부했다. 그렇게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는 2015년 4월 13일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 Chacón Ramírez, C. A., & Botero Herrera, D. A. (2016). Entre el miedo y el derecho al delirio: un decir desde los ninguneados de Eduardo Galeano. Hallazgos,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