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무용 창시자 이사도라 덩컨의 생애

2019-10-15
이사도라 덩컨의 삶은 재능, 반항심, 그리고 비극의 조합이었다. 덩컨은 클래식 발레의 혁명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을 자유롭게 표현하고자 했다.

이사도라 덩컨은 틀을 깨기 위해 세상에 나온 여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현대 무용의 창시자로, 예술계에서 가장 매혹적이고 혁명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다. 더구나 그녀의 생사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흘러갔다.

이사도라 덩컨의 삶도 고통과 비극으로 가득했다.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그녀를 관대하고 모성의 여자라고 묘사했다. 관객들에게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가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도 항상 자신의 마음을 말하는 여자였다.

그녀의 스타일은 감동이 넘쳤고, 고전적인 댄스의 진부함과 투쟁했고, 더욱 진실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바다의 파도를 보면서 춤에 푹 빠졌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동작은 자유롭고 유창했으며, 마치 파도가 몸을 흔들게 하는 것처럼 커다란 감정적 표현을 선사했다.

춤추는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덩컨의 유년기

그녀의 본명은 안젤라 이사도라 덩컨이었고, 1877년 5월 27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조셉 찰스(Joseph Charles)는 대출 담당관이었고 그녀의 어머니인 메리 이사도라 그레이(Mary Isadora Gray)는 음악 교사였다. 그녀는 4명의 아이 중 막내였고, 슬프게도,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주 어렸을 때 가족을 떠났다.

그 가족은 힘든 재정적인 상황을 겪었기 때문에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피아노 레슨을 시작했고 나중에는 무용학교를 설립했다. 두 형제는 어머니 학교에서 댄스 강사로 일했다. 따라서 이사도라가 겨우 10살이었을 때, 그녀는 동생들과 함께 학교에서 일하기 위해 어린아이들에게 춤을 가르치며 살기로 했다.

후에, 가족들은 시카고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이사도라가 클래식 댄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화재로 인해 집을 잃고 이번에는 뉴욕으로 가기로 했다. 뉴욕에서 젊은 이사도라 덩컨은 극장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가족에게 돌아가지 않았던 그녀의 아버지는 1898년 난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유럽의 이사도라 덩컨

아마도 이사도라가 유럽 여행을 하게 된 것은 유럽 클래식 음악에 대한 그녀의 열망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가족과 함께 가자고 설득했다. 심지어 그 당시에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덩컨 가족은 런던에 정착했고 나중에는 파리에 정착했다.

이사도라는 훌륭한 유럽 박물관을 자주 방문했는데 특히 그리스 예술에 감탄했다. 그녀는 조각에서 본 몇몇 자세들을 토대로 춤을 고안했다. 그녀가 유년기에 겪은 경험과 관찰력으로 자신만의 스타일을 형성했고, 그렇게 만든 자신만의 춤으로 무용의 역사를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덩컨은 그 후 맨발로 그리스식 가운을 입고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또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춤 용이 아닌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녀는 공연할 때마다 즉흥연주를 하고 바로바로 동작을 생각해 냈다. 고전무용에서 나온 투투와 베일 등 경직된 동작은 뒷전으로 여겼다.

혁명가

이미 예상했겠지만, 처음에 사람들은 이사도라를 비난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그녀는 전문가들과 비평가들에게 감탄사를 자아냈다.

그녀는 무용계에서 불손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녀 시대의 기준으로 볼 때 그녀의 사생활 역시 추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이사도라는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장애물을 무시하기로 하고 계속해서 두 아들의 싱글맘이 된 것이다.

그녀에게는 많은 연인이 있었고, 그들 중 몇몇은 꽤 유명했다. 그녀에 대한 동성애 의혹도 소문으로 나돌았지만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그녀는 그 당시 극도로 과감한 성격이었다. 한 번은 가운을 벗어 젖가슴을 드러내며 청중을 뿌리쳤다.

게다가 아르헨티나에서는 술집에서 애국가를 추기도 했다. 그녀는 분명히 무모한 여자였고 자신의 금전적 상황을 돌아보지 않았다. 하루는 입고 있던 모피코트와 약간의 보석으로 호텔비를 지불한 적도 있다.

이러한 면모와 다른 많은 스캔들 그리고 그녀가 대중들 앞에서 던진 언변들 때문에, 미국 사람들은 그녀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스카프와 춤추는 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덩컨의 비극적인 결말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은 1913년에 일어났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은 파리 센강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녀는 이 비극을 극복하는 데 몇 년이 걸렸다.

이사도라 덩컨은 러시아 혁명을 깊이 존경했다. 레닌은 그녀를 러시아에서 살며 예술을 하도록 초청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그녀보다 17살 어린 시인 세르게이 예세닌을 만나 결혼했다.

에세닌의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결혼생활은 거의 지속하지 않았고, 결국 에세닌의 자살로 슬픈 결말을 남기며 끝나버렸다.

2년 후인 1927년 9월 14일 이사도라 덩컨이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목을 가린 긴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차 바퀴에 그녀가 메고 있던 스카프가 엉키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Je vais à l’amour”(“내 사랑 보러 떠난다”)로, 그녀가 그날 참석하려고 했던 데이트에 관해 이야기한 것으로도 전해진다.

의심의 여지 없이 흥미롭고, 비정형적인 이사도라 덩컨은 무용수로서의 재능 때문에 역사에 남았던 잊을 수 없는 인물 중 한 명이다.

댄스계에서 여성과 예술가들이 기다리던 ‘기존의 기준’을 깨뜨려 준 그녀의 용감함과 대담성 때문에 아직까지도 많은 무용수의 존경을 받고 있기도 하다.

  • Duncan, I. (2003). El arte de la danza y otros escritos (Vol. 19). Ediciones Ak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