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과학과 종교

2019-11-15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는 과학을 굳게 믿었지만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임을 당한 혁명가이다. 그녀에 대한 모든 것을 여기서 읽어보도록 하자!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는 최초의 철학자, 수학자 및 물리학자였다. 그녀는 서기 4세기 말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5​​세기 초에 알렉산드리아의 교사이자 신플라토닉 학파의 장이었다. 히파티아는 기하학 및 논리와 같은 주제에 지식이 상당했다. 즉, 히파티아 그녀는 신플라토닉 법칙에 의해 확립된 금욕주의적 생활을 이끌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그녀는 교사이면서도 귀족, 기독교 및 비기독교를 위한 최고의 퀄리티를 자랑하는 학파의 교육자였으며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그녀가 어떻게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는지를 보여주며 타인들이 그녀를 부러워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과학적 업적 중에는 천체 둥근 천장에서 별 상태를 알아내는 데 쓰이는 초기의 천문 관측의이다. 그 외에도 복잡한 수학적 계산 없이도 액체의 상대 밀도를 밝히는 데 사용되는 도구인 유속계를 발명했다.

히파티아의 드로잉

기독교인과 비기독교: 과학과 종교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과 비기독교 사이의 피로 얼룩진 내전의 핵심 본부와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총대주교 테오필루스는 당시 기독교의 최대 대표자였다. 그는 비기독교적 종교 숭배(비기독교적인 모든 형태)를 끝내려고 했다. 다른 한편으로, 지성을 갖춘 엘리트들은 비기독교도 사원의 옹호자들을 지지했다. 비기독교를 옹호한 모든 철학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를 떠났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그녀는 철학, 과학 및 수학은 정치적 종교적 논쟁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이 모든 내전이 그녀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듯이 가르침을 지속했다. 사실, 그때까지 아무도 그녀를 성가시게 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항상 이 사안에 대해선 중립적인 입장을 유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거역할 수 없는 ‘시릴’이 등장했을 때, 기독교가 아닌 모든 것과 모든 사람에 대한 박해의 수준이 크게 증가했다. 이번에는 히파티아는 이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대신에 그녀는 의무 및 견고함과 국가의 질서를 위임하고 있는 제국의 의원인 오레스테스의 편을 택했다. 결국, 히파티아는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폴리스 종교가 정치의 일부일뿐 다른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할 때  모든 전통적인 것이 그녀를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생각은 정치와 시민 복지가 항상 종교적 권위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히파티아는 비기독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함께하는 알렉산드리아 엘리트들에게 수업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녀는 기독교가 다른 철학적, 종교적 아이디어와 양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산 증인이었다. 그녀를 존경하는 모든 분야와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는 자료가 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도시에서 그녀를 원하지 않는 종교 광신자들로 가득하여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기독교 종파 때문이었다. 또한, 그녀의 영향력은 종교만큼 강하지 않았지만 낮은 계층에도 도달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

알렉산드리아의 이교도이자 마녀인 히파티아

기독교인들은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를 이교도라고 부를 것이다. 그녀의 ‘마녀술에 빠졌다’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맹자에게 수학 표식은 악마를 불러오는 주문 것처럼 보였다. 또한 천문학과 점성술을 혼합했다. 갑자기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는 흑마술의 마녀가 되어있었다.

415년 3월 어느 날, 히파티아는 사순절 동안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갑자기 군중들이 그녀를 공격하였고 그녀를 마차에서 꺼내 알렉산드리아의 케사리움 교회로 데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벽에서 뜯어낸 도자기 조각으로 그녀가 살아있는 채로 피부를 벗겨냈다. 그 후 그들은 불을 피워 그녀의 유해를 태워버렸다.

이러한 살인은 분명히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인 사건이었다. 이를 철학적이라고 하는 이유는 히파티아가 항상 광신적인 믿음에 대한 대화와 이성을 변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는 종교정치에 순종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는 정치적이었다. 마지막으로,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가 아마도 비기독교와 기독교 사이의 문화적 전쟁을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기에 종교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