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2019-10-09
마네의 작품은 유럽 화가들이 작품 소재를 선택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그의 등장 이전에 화가들은 일반적으로 서술적인 감각으로 일상의 더러운 현실을 회피해왔다. 이제부터 에두아르 마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에두아르 마네, 이름만 들어도 대표작이 바로 떠오르는 그는 19세기 프랑스 화가로 독특한 스타일과 초점으로 이후의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준 사람이다. 마네는 전통적인 그림 소재를 거부하고 당시의 사건이나 상황을 그리는 새로운 예술의 길을 열었다.

1863년 ‘풀밭 위의 점심 식사’라는 작품을 그렸을 때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상주의 화풍을 따르는 차세대 화가들에게는 엄청난 찬사와 열광을 받았다.

에두아르 마네: 그의 인생

인생 초반

에두아르 마네는 1832년 1월 23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어거스트 마네는 법무부의 매우 고위직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외교관의 딸이자 왕위 계승자인 스웨덴 왕자를 대부로 가진 사람이었다.  

고위직과 깊은 연관이 있는 부유한 마네의 부모는 아들이 존경받는 직업을 선택하길 원했고, 그중에서도 특히 변호사가 되기를 가장 바랐다고 알려졌다.

마네가 이렇게 예술가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을 그의 부모는 알지 못했다.

1838년 마네는 보지라르의 캐논 포일럽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1844년부터 1848년까지 롤린 대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좋은 학생이 아니었고 학교에서 유일하게 흥미를 보인 수업은 그림 그리기 뿐이었다. 

마네의 아버지는 마네가 법학 대학에 입학할 것을 바랐지만 마네는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버지가 화가의 길을 반대하자 그는 해군 학교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입학시험에 통과하지 못했다.

막 16살이 된 마네는 화물 선박의 항로를 찾는 일의 수습으로 일했다. 1849년 6월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해군 시험을 봤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부모는 결국 아들의 고집에 이기지 못하고 화가의 길을 허락했다. 

더 읽어보기: 고흐의 예술에 나타난 공감각의 힘

에두아르 마네의2

에두아르 마네의 최초의 공식 수업

1850년 마네는 고전 화가 토마 쿠튀르와 공부를 시작했다. 그림 그리기에 대해 이해하고 그 기술을 익히기 시작한 때이다.

1856년, 쿠튀르와 함께한 지 6년이 지났을 때 마네는 군대 그림을 그리던 화가 알베르 발레로이와 작업실을 함께 사용하게 되었다. 버찌를 든 소년 (1858)을 그린 장소이다. 곧 그는 다른 작업실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59)을 그렸다.

같은 해에 마네는 네덜란드, 독일, 이탈리아로 잠시 여행을 떠났다. 이 국가들을 여행하는 중간에 루브르에 머무르며 티치아노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복제하기도 했다.

사실주의 그림으로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마네는 좀 더 편안하고 인상주의적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그가 매우 넓은 붓 선을 사용하고 일상적인 일을 하는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는 것이다.

그의 캔버스는 가수, 거리의 사람들, 로마 사람들, 거지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평범하지 않은 소재였지만 과거 거장들이 남긴 방대한 예술 지식과 합쳐진 그의 작품은 몇몇 사람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에두아르 마네: 성년기와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2년과 1865년 사이에, 에두아르 마네는 갈레리아 마티넷의 작품 중 몇 작품을 설명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1863년 자신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던 네덜란드 출신의 쉬잔 린호프와 결혼했다. 공식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이미 10년 동안 함께 살고 있었으며 둘 사이에 아이도 한 명 있었다.

같은 해, 미술전 심사위원들이 마네의 혁신적인 스타일의 작품, 풀밭 위에 점심 식사를 거부했다.

“나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린다. 그들의 모든 학습은 상관하지 않는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에 점심 식사전원 음악회(조르조네, 1510), 파리스의 심판 (라파엘, 1517-20)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이 그림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전시회에서의 악평”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화가 인생 내내 마네를 괴롭혔다. 

비평가들은 마네의 작품 속에 현대 의상을 입은 두 명의 젊은 남자 사이에 한 명의 나체 여성이 있다는 사실에 매우 불쾌함을 느꼈다. 모호한 우화처럼 표현된 것이 아닌 그림 속 여성의 현대성은 그녀의 나체 상태를 천박하고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지게 했다.

또한, 마네가 거칠고 인간미가 느껴지지 않는 빛 속에 사람들을 그려 넣는다는 사실이 비평가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절대 현실일 수 없는 숲속에 사람들이 있는 이유 역시 이해하지 못했다.

주요 작품

2년 후에 그린 작품, 올랭피아는 1965년 미술계에 또 다른 스캔들이 되었다. 나체의 여성이 바닥에 누워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향해 강한 눈빛을 보내는 그림이다. 그림의 내부 공간이 거의 지워질 정도로 거칠고 밝은 빛으로 표현되었고 그림 속의 여성은 2차원의 존재처럼 보였다.

프랑스 정치인 조지 클레망소가 1907년 루브르에 설치하려고 했던 이 현대적 작품은 비평가와 대중 모두에게 외설적이라는 평을 들었다.

연회에 참석했다가 깊은 감동을 한 마네는 1865년 스페인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곳에서 머무른 시간은 길지 못했다.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고 낯선 언어로 인해 힘들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에 머무르는 동안 마네는 테오도르 뒤레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뒤레는 마네 작품의 가장 큰 지지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866년, 마네는 소설가 에밀 졸라와 연이 닿아 우정을 쌓게 된다. 졸라는 1867년 프랑스 뉴스 피가로에 매우 인상적인 기사를 기재했다.

졸라는 대부분의 중요한 예술가들이 대중의 반감을 사며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이 평가는 미술 평론가인 루이 에드몽 뒤랑티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 역시 마네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잔, 고갱, 드가, 모네와 같은 화가들 또한 마네를 지지하게 되었다.

더 읽어보기: 모네: 인상주의 대가

에두아르 마네의3

에두아르 마네: 노년

1874년 마네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최초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초대를 받는다. 인상주의를 지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초대를 거절하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이어지는 모든 초대를 다 거부한다.

마네는 자신이 미술계와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작품들처럼 에두아르 마네라는 사람 자체가 모순이었다. 그는 부르주아자 일반 계급이었고 전통적이고 급진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현재에 충실해야 하고 자신이 보는 것을 그려야 한다.”

-에두아르 마네-

최초의 인상주의 화가 전시회가 열린 이후 1년이 지났을 때 마네는 에드거 앨런 포의 갈까마귀의 프랑스판 삽화를 그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 1881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레지옹 도뇌르 (프랑스 최고 권위의 훈장)을 수여 했다.

그리고 2년 후인 1883년 4월 30일 파리에서 사망한다. 마네는 420점의 작품과 함께 영원히 자신을 대담하고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기억하게 할 명성을 남겼다.

그의 유산

마네가 화가로 처음 데뷔를 했을 때 그의 작품은 매우 많은 비평과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화가로서 인생이 거의 끝날 때까지도 그러한 비판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네의 유명세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기념하는 전시회가 성공하고 비평가들이 인상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덕분이다. 하지만 20세기가 될 때까지 예술 역사가들은 마네를 당대의 가장 중요한 화가 중 한 명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전통적인 소재와 관점을 거부한 마네는 19세기 미술계의 기준을 거부하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인상주의 화가와 포스트 인상주의 화가들이 혁신적인 작품을 그릴 수 있도록 초석을 닦아준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마네는 19세기와 20세기 예술계에 매우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이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네는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테마에 집중했고 직접적이고 멀리 떨어진 시점에서 그것을 표현했고, 이는 그를 정통 미술계에서 더욱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 Venturi, L., & Fabricant, L. (1960). Cuatro pasos hacia el arte moderno: Giorgione, Caravaggio, Manet, Cézanne. Nueva Visión.
  • Álvarez Lopera, J. (1996). Revisión de un lugar común: Goya y Manet. Reales sitios, 33, (128). Patrimonio Nacional, Madr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