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냉소주의가 과거에는 좋은 것으로 여겨졌던 이유

2018-07-01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는 냉소(Cynicism)의 아버지이다. 그는 B.C. 4세기 경 고대 그리스에 살았다. 이 냉소주의를 따르던 과거의 지지자들은 오늘날의 냉소주의자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냉소는 순수한 비판이었다. 그들은 사회의 넘쳐 나는 위선에 동의하지 않았고, 훨씬 더 진정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싶어했다.

“냉소(Cynicism)”라는 말은 “개”를 뜻하는 그리스 말인 “키누스”에서 나왔다. 그 이유로 그 당시의 사람들은 냉소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것을 개의 인생과 비슷한 의미로 생각했다.

디오게네스는 스스로 개처럼, 완벽한 빈곤 속에 살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철학적 가르침은 진심으로 날카로워서, 그를 그 시대의 가장 예리한 사상가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개 비유는 개의 삶의 양 면을 보았다.

“냉소는 당신 자신과 다른 사람들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약처럼 작용한다. 그것은 그 미묘한 독약이 당신의 인생 전체에 스며들 때까지 당신이 그 위험을 느낄 수 없도록 마취제가 되어준다. 처음에 그것은 확실하게 당신을 안정 시키고, 당신의 공포에 맞서 웃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당신의 몸에 독약을 심어 놓는다. 

-마르셀라 세라노-

오늘날 냉소는 매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현대 사회는 냉소주의의 가치를 믿지 않고, 그것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회를 향상 시키겠다는 관점에서 사회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규탄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어떤 유효한 공헌도 하지 않는다.

우리 역시 냉소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을 쉽게 이용하고, 심지어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에게 사용한다.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와 최초의 냉소주의

디오게네스는 멋지고 충만한 정신적 위대함으로 칭송 받고 있다. 집이 없었던 그에게 유일한 집은 커다란 통 속이었다. 그는 그가 입고 다니는 누더기로 인해 거지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시대에 가장 통찰력 있는 인물 중 한 명 이었다. 플라토는 그를 “미친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누더기를 입은 디오게네스 그림

알렉산더 대왕은 그에 대해 알고 싶어했다. 그는 그를 찾아가서 “나는 알렉산더 대왕이다”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이 냉소가는 “나는 디오게네스, 개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짧은 대화 이후, 알렉산더는 그에게 말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말해보라.” 디오게네스는 “비켜주시오, 당신이 지금 태양을 가리고 있소”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일례에 따르면, 디오게네스가 어느 날 광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 통에 버린 채소를 먹고 있었다. 또 다른 철학가가 그를 지나가며 말했다, “나처럼 귀족을 위해서 일하면, 채소를 먹지 않아도 될 것이오.” 디오게네스는 “만약 당신이 나처럼 채소를 먹는다면, 당신은 귀족을 일해 일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가 어떤 종류의 사상가였는지를 말해준다.

현대의 냉소주의

장소와 시대를 가리지 않고, 권력과 돈은 언제나 부패의 원인이 되어왔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등장과 위대한 유토피아의 몰락으로 인해 이제 그것은 가장 최고점에 도달했다. 돈과 권력은 우리 시대에 벌어지는 가장 비열한 행동들의 동기가 되었다. 

사람 모양 저금통 그림

현대 냉소주의의 아버지는 위대한 힘의 철학가, 마키아벨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등장 이후, 개인주의를 가장 높은 가치로 삼는 철학가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들은 인간은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이기심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 모든 행동은 완벽하게 유효하다, 그것이 무엇이건 관계없이. 

역사를 통틀어, 위대한 정치가 또는 경제적 권력자는 언제나 훌륭한 냉소를 가지고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회를 이끌거나 지도하는 명목 상의 최고위자로서, 그들은 많은 사람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완벽하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위대한 이상론과 유토피아가 붕괴된 이후, 그 믿음은 더욱 강해졌다. 돈의 힘에 굴복되었고, 그것이 바로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한다는 말이 그토록 관련 있는 말이 된 이유이다. 

대인 관계에서의 냉소

권력의 상위 계급부터 냉소주의는 확산되었고, 우리의 일상적인 관계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특히 권력 다툼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 이것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일례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성인과 아이의 관계에서도 이것을 느낄 수 있다.

냉소주의에 반대하는 강한 기류가 있지만, 이것은 여전히 현대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매우 미묘한 방식으로 표현되어진다.

앞서 언급한 관계들에서 고용주, 남자 또는 성인이 자신의 변덕에 따라 원칙을 정할 때와 같은 것이다. 그러면, 고용인, 여성 또는 아이는 저항한다, 그러면 권력을 가진 자들은 “싫어도 그냥 받아들여!” 라고 답한다.

냉소적인 행동은 삐뚤어졌다. 그것이 인간 관계에 끼어들면, 그것은 그 관계를 매우 건강하지 못하게 만든다. 기간의 길이와 상관없이, 이런 종류의 행동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거짓 애정은 숨겨진 죄악을 더욱 부추기고 위선을 자극한다. 그것은 즉각적인 이기적 만족감을 주지만,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이미지 출처: 킬리 스페어 (Kylli Spar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