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이자 생존자인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전기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삶은 두 가지 위대한 진실의 증거다. 첫 번째 진실은 행복한 어린 시절이 인생의 가장 큰 도전에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긍정적인 태도가 모든 도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가이자 생존자인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전기
Gema Sánchez Cuevas

작성 및 확인 심리학자 Gema Sánchez Cuevas.

마지막 업데이트: 07 4월, 2020

오늘 우리는 죽음을 모면하고 110세가 될 때까지 살았던 놀라운 생존자인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삶에 관해 배워볼 것이다.

우리는 왜 그녀를 생존자라고 부를까? 그녀가 아주 어린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유대인이었고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하지만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살아남았고, ‘세계에서 가장 낙관적인 여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많은 인터뷰에서 알리스 헤르츠좀머는 쌍둥이 자매에 관해 이야기했다. 여러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알리스는 자신과 자매의 태도가 매우 달랐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낙관론자로 태어났고 상황이 아무리 나쁘더라도 항상 긍정적인 측면을 보려고 노력했다고 전했다.

“증오는 증오를 가져오므로 나는 내 자녀가 증오에 찬 삶을 살기를 원치 않았으며, 그래서 증오라는 말을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나는 정말 그렇게 했다. 내 아들은 독일에 아주 좋은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은 함께 어울리기 위해 아들을 초대하고 또 아들을 소중히 여겨 주었다. 그리고 나 또한 결코, 결코 그들을 미워한 적이 없다.”

-알리스 헤르츠좀머-

사람들은 알리스의 열정에 찬사를 보냈다. 나이가 아주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매일 피아노를 연주했다. 또 그녀는 거의 100살이 되었을 때 대학에 가기로 했다. 이처럼 학습과 자기 계발에 대한 열정을 절대 잃지 않았다. 알리스 헤르츠좀머는 우리가 모두 본받을 수 있는 장수와 낙관주의의 훌륭한 예이다.

예술가이자 생존자인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전기

알리스 헤르츠좀머의 행복한 유년 시절

회복력이 높은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는 바로 행복한 유년시절이다. 알리스 헤르츠좀머는 1903년 11월 26일 체코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예술과 문화를 높이 평가하는 유대인 음악가 가족 출신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은 알리스의 집을 자주 방문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도 단골이었다. 그리고 알리스의 자매는 심지어 이 문학 천재의 가장 친한 친구와 혼인을 했다. 그 외에도,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토마스 만(Thomas Mann), 게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와 같은 유명한 사람들이 헤르츠 가족을 방문했다.

알리스는 아주 어릴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그녀는 8살 때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고, 십 대가 되었을 때는 프라하 전역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나치의 침공

1931년 알리스는 동료 음악가인 레오폴드 서머(Leopold Sommer)를 만났다. 그들은 결혼했고, 서머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위대한 사랑이 되었다. 1937년에 그들은 첫아들인 라파엘을 낳았다. 그러나 나치가 1939년 체코를 침공하면서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대부분 유대인은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보내졌지만, 알리스와 그녀의 가족은 당분간 아파트에 머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금방 어려워졌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체코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1942년 알리스의 어머니와 레오폴드의 부모는 추방 서한을 받았고 이는 온 가족을 황폐화했다.

알리스는 72살이 된 어머니를 추방 센터로 모셔가야 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작별 인사를 했고, 알리스는 어머니가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무력감이 밀려오는 순간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경험 중 하나였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알리스를 우울하고 슬프게 만들었다.

나치의 침공

알리스 헤르츠좀머: 죄수로서의 삶

그 후 더 많은 추방 명령이 전해졌다. 1943년 알리스 헤르츠좀머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아들도 추방 명령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테레지엥슈타트의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다. 원칙적으로 그곳에 있는 죄수들은 살려준다는 보장을 받았지만, 그건 거짓말로 밝혀졌다.

그 캠프에서, 알리스는 나치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알리스의 아름다운 콘서트를 즐기면서 식사를 했고, 그 죄수들을 몰살시킬 방법을 계획했다. 알리스는 또한 다른 죄수들을 위해서도 연주를 했다. 그녀는 총 150회 이상의 콘서트를 연주했다고 밝혔으며, 그녀의 음악이 강제 수용소에서 고통받고 있던 영혼들의 마음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나중에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두 사람이 작별 인사를 할 때 그는 그녀에게 “어떤 일에도 자원하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며칠 후, 나치는 남편과 다시 만나기를 희망하는 ‘지원자들’을 모집했다. 그때 알리스는 레오폴드의 조언을 기억하고 제안을 거부하여 자신의 생명을 구했다. 알리스는 이러한 경험을 할 때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바로 아들이 배고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 배고픔을 메꿔주기 위해 알리스는 얼굴에 늘 미소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생존자

알리스 헤르츠좀머와 그녀의 아들은 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였다. 전쟁이 끝나자 그들은 이스라엘로 옮겨졌다.

알리스는 그때 과거에 남아 있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증오나 원망 없이 아들을 키우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라파엘은 부모의 음악적 발자취를 따라 유명한 첼리스트가 되었다.

알리스는 영국 런던에서 11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삶은 인간 정신의 놀라운 회복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예이다. 그녀의 유산은 우리의 태도와 삶에 대한 낙관이 미래를 결정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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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toessinger, C. (2012). El mundo de Alice: lecciones de vida de una superviviente del holocausto. Grupo Planeta (G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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