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용감한 일이다

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용감한 일이다
Álvaro Cabezuelo

작성 및 확인 심리학자 Álvaro Cabezuelo.

마지막 업데이트: 27 12월, 2022

살면서 몇 번이나 슬픔을 인정하는 것을 피하고 오히려 가리려고 했는가? 어렸을 때부터  사회는 우리에게 슬퍼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고, 그렇기에 우리는 용감해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강해야하며, 비틀거리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사회는 유일하고 바람직하고 건강한 감정이, 바로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을 담을 지언정, 그 행복이 극한적이지는 않다.

물론 슬픔은 부정적인 가치를 지닌 감정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슬픔을 우리에게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면 어떨까? 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어렵지만, 일단 슬픔을 인정하고, 그 슬픔을 통해 배운다면 어떨까? 참으면서 삭히기보다, 슬픔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다면 어떨까?

슬픔을 인정하는 것: 기본적인 감정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 때, 예를 들어, 가족 구성원의 손실, 연인과의 이별, 해고, 어떤 질병 등… 이것은 종종 우리를 슬프게하는 상황 중 일부이다. 물론 즉각적인 슬픔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어떤 힘이 우리의 손실을 초래했는지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슬픔과 우울증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후자는 감정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사건이나 순간을 초월하는 질병이다. 또한, 우울증의 진단을 위해서는 다른 증상과 함께 지속적이고 강렬한 슬픔이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차이가 매우 중요하지만, 슬픔은 우울증과 비슷하게 보인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슬픔에서 ‘벗어나려고만’ 한다.

슬픔을 인정하는 것은 용감한 일이다

우울증을 겪게 되면, 수면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고, 단순히 슬픈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게 되고, 이전의 활동에서 기쁨을 얻지 못하고, 일상 생활에서의 욕구 부족, 집중력 상실, 죄책감을 경험하게 된다. 혹시 당신이 이 상황을 겪고 있다면, 전문적인 도움을 구할 때이다.

그러나, 슬픔 자체는 감정으로서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독특한 기회이다. 일부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상실한 후에 대응할 수 있도록, 우리 몸에서의 더 큰 활성화와 관련이 있는 감정이다. 또한 그것은 임상 치료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과 도움이 필요한 감정이다.

슬픔을 인정하는 것… 눈물의 의미

우리 인간이 지금까지 흘린 모든 눈물에도, 우리는 아직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신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로서, 그 슬픔의 역할은, 해방이라는 것과 안락함에 대한 필요성을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가 슬픈 일이 생기면, 우는 것 뿐 아니라,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는 것은 정상이다. 우리가 울게 되는 상황 또한 매우 다양하다. 우리는 행복에서 우러나거나, 우리 주변 사람들과 공감하거나, 분노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감동적인 영화를 볼 때 울 수도 있다. 모든 눈물은 중요한 것을 이야기한다.

눈물

우리가 눈물을 보이거나, 우는 것이 나쁘다고 해서 우리를 더 강하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 관해 말할 수있는 것을 기반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 정말로 울지 않는 사람이란 있는 걸까? 만약 있다고 한다면, 뭔가가 잘못된 것이다.

우는 것이 우리를 진정시키고, 우리의 불안감을 낮추고, 우리가 더 호흡할 수 있도록 만든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는 행동이며,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지키기 위해, 세균을 없애줄 수도 있다. 눈물이 정녕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슬퍼하지 말고 강해져라”: 우리가 슬픔을 인지하지 못할 때

혹시, 당신이 쉽게 우는 사람이라고 해서, 주변에서 이에 대해 누군가가 질책한 적이 있는가? 당신이 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약한 사람들을 위해 우는 모습을, 우스꽝스럽게 여기고, 심지어 더 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불행히도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눈물에 대한 시선이 너무나도 부정적이라는 이유로, 우리 자신이 내면화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눈물의 검열자가 되었다.

즉, 우리가 왜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은 악의가 아니라, 순전히 우리 자신을 위한다는 이유로 행동할 수도 있다. 결국, 그들은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이고, 우리가 배우는 모든 삶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레퍼토리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자동으로 공유하게 된다.

눈물

그러나, 우리가 말했듯이, 이 진부한 표현은 결코 무해하지 않다. 이 메시지의 수용과 사회화는, 우리를 뒤쫓는 새로운 세대를 키우는 원동력이 된다. 아이들은 일반적으로 사춘기 및 성인기에 필요한 단계인 것마냥, 이 슬픔에 대한 ‘규제’를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모든 가치관에 관계없이, 우리 자신의 슬픔을 인식하고, 모든 감정의 역할을 이해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우리는 슬픔을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슬픔이 우리의 치유와, 동기 부여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도록 해야 한다.

반면에, 이론적으로 우리의 감정적인 부분을 논리적인 부분과 분리하는 것은 매우 교육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기능적인 면에서 보건대, 우리는 이러한 과정이 서로 섞여 있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 각각의 역할과는 전혀 다른 역할을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슬픔은 우리의 감정 중 하나이며, 잘 사용하고 신중하게 활용할 수 있는, 우리의 가장 큰 동맹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더 이상 슬픔과 싸우지 말자. 우리에게 더 많은 실망과 고통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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