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가 없는 행복: 행복으로 가는 길
나를 가르치는 제자가 나에게 한계란 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면, 나는 이에 대해 한계가 움직임과 같다고 답한다. 때때로 절벽에서 막혀 끝나버리지만, 때로는 절대 끝나지 않는 움직임. 그것은 ‘소유’를 향한 움직임일 수 있다. 이것이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사실, 행복에는 한계가 없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개미’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베짱이’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인다 (뭔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면, 우화 [개미와 베짱이]를 떠올려보자). 물론 베짱이는 이 유명한 이야기의 마지막에 그 대가를 치룬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으며, 일이 잘못된다면, 이를 복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원이 필요할 지 알 수 없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이 철학의 복잡함을 이해할 수 없고, 지식을 시험에 합격하는 방법으로만 여긴 채, 이러한 방식으로 부모의 행복을 주려 한다.
이 지식은, 아이들이 사랑에 빠지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그 당시의 아이들은 모든 것을 알고 싶어한다. 그들은 할 수있는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에 매료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 지식의 엔진이 되는 방법이다. 어릴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상화로 자신을 강화하는 운동이다.
“수천 개의 촛불이 하나의 촛불에서 켜질 수 있으며, 그 촛불의 수명은 단축되지 않는다. 행복은 결코 공유될 수 없다.” – 석가모니
행복과 “갖고자 하는 욕망”
가장 빈번한 동기 중 하나는 바로 ‘갖고자 하는 욕망’이다. 우리는 소비주의로 끊임없이 흐르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은 점점 더 많은 것을 습득하여 삶의 질을 유지하거나, 심지어 그것을 향상시킬 것을 권장하고 있다.
사회의 돈은 이 필요를 이용하고 우리를 유혹한다. 그것은 우리의 존엄성, 신체, 또는 우리의 이타적인 동기를 유혹한다. 돈이 저항할 수 있는 매력을 얻는 방법이 이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혼을 악마에게 파는 방법이기도 하다.
돈은 당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가야 할 수도 있지만, 특히 사람들이 돈을 버는 곳으로 가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돈을 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야한다는 타당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정치와 스포츠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신체를 악용하여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한 원인이다. 그것은 또한 나치 독일의 상당 부분을 살인자의 변덕을 발휘하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거기에 간다면, 그것이 분명히 행복의 길일거라 여긴다. 그리고 그렇다면, 우리가 이에 따르지 않을 이유가없어진다.
행복과 즐거움
행복이 함께하는 한, 동시에 불만이 함께하는 ‘원동력’이다. 그것이 즐거움이다. 만족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구가 우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이 아닌 일시적인 것을 원하게 만든다. 진정한 영원한 행복보다는 단명한 쾌락을 찾게 된다. 이 방법으로 즐거움은 우리의 허약함을 유혹한다. 내일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오늘을 즐기도록 만든다.
그러나, 누가 이 끊임없는 메시지와 싸울 수 있을까? 신문은 불행어린 소식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만큼 희망의 근원은 거의 없다. 어떻게든 우리는 행동이 존재하는 빈도에 맞추어 진다고 가정하게 된다.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이것은 우리가 즐거움에 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한, 우리가 죽어도 상관하지 않는 지점에 이르는 방식이다. 하지만 정말 놀랍게도, 그 우화의 메시지와 개미의 태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을 대비하여 모아놓는다는 생각. 이것을 역으로 비틀어서 말하자면, 신경증이 나타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해산시키는 무책임하고 통제 불능의 행동이 될 수 있다. 계속 노력하기 위해,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 이유를 잊어 버렸다… 그리고 평범한 상식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당신이 책임감이나 즐거움을 선택할 지를 모를 때 일어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이유를 우리에게 주는 상식을 잊어버리게 된다. 우리의 진실한 가치와 우리 주변 사람들의 가치와 관련이 없거나, 돈과 관련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는 이성. 빅터 프랭클의 유명한 작품을 고찰 하면서, 이 상식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자. 그는 상식이란 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에 관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한 것이라고 묘사한다. 상식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분명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덕으로서의 행복: 행복에는 한계가 없다
행복에 대한 보다 매력적인 해석은 미덕과 관련된 것이다. 운전석에 우리를 단단히 고정시키고 우리의 목표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에게 감사, 용서 또는 사랑과 같은 미덕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우리의 존재 속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포용하는 활동. 우리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대한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활동, 그리고 현재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나누는 가능성.
이 길에는 또한 알고 싶은 욕망이 존재한다. 다른 사람들을 알기 위해서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알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위에서 언급한 첫 번째 지식과 같이, 끝이 없을 지식이지만, 동시에 안정과 안전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을 통해 이런 식으로 걷는다면, 몇 가지 질문과 몇 가지 대답이 존재할 것이다. 우리의 그림자는 우리의 행복이 될 것이다. 필요에 대한 욕구와, 필요성의 차이점을 알려줄 것이다.
행복에 대한 추구는 실제로 끝이 없는 한계가 될 것이다. 행복은 움직임이지만, 동시에 무한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충만함 속에서 걷는 법을 배우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