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두려움의 부재인가: 상호 배타적 관계

행복과 두려움은 같은 방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공포의 부재는 평화의 존재다. 생각을 멈추면 우리의 일상의 두려움은 대부분 상상이며,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포를 허용하여 우리를 마비시키는 것은 사슬에 묶이고, 제한되고, 자기 보호의 거품에 구속되는 것이다.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인가: 상호 배타적 관계

마지막 업데이트: 18 2월, 2020

에두아르도 펀셋(Eduardo Punset)은 우리에게 인간 지혜의 놀라운 유산을 남긴 대중적인 정치인이다. 오늘, 우리는 그의 가장 밝고 흥미로운 진술들 중 하나를 토론할 것이다.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라는 제안에 그는 아름다움은 고통의 부재라고 덧붙였다. 행복과 두려움은 상호 배타적인가?

펀셋은 현 세계의 많은 현실을 반영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추구하는 ‘행복’의 일반적인 유형이다. 행복은 아주 인기 있는 단어다. 하지만, 또한 행복은 정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은 아마도 우리가 행복에 도달하려고 노력할 때 마주치는 첫 번째 어려움일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행복이 무엇인지 정말로 알지 못한다.

“행복의 첫 번째 조건 중 하나는 인간과 자연의 고리가 깨지지 않는 것이다.”

레오 톨스토이

어떤 이들은 성공이나 권력을 좇아 행복을 추구하는 반면, 어떤 이들은 사랑과 애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 다른 사람들은 실망하는 것에 싫증이 나서 더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에두아르도 펀셋이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라고 말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훨씬 현실적이고 심오한 관점을 준다. 왜 그런지 보자.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인가?

행복과 두려움은 상호 배타적인가?

확실히 우리는 모두 큰 손실을 보았을 때조차도 그들이 누구이고 무엇이며 무엇을 가졌는지에 만족하는 누군가를 만났다. 또한, 당신은 그 반대인, 즉 권력, 사치품 그리고 많은 사람의 사랑이 있는 ‘매우 성공한’ 사람을 만났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하지만, 그들은 행복하지 않다.

대부분의 문학이 “행복은 우리 안에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행복을 너무 자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반대 상황에 해당한다. 즉, 우리는 행복의 기초로서 끊임없이 외부의 자극을 찾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을 얻으면, 그 후에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부 자극은 사랑하는 사람, 객관적인 사람 혹은 어떤 상황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요인에 우리 자신을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행복할 때 우리가 상상한 것만큼 완전하지 않다는 것도 발견했다.

펀셋이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라고 말할 때,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지적한다.

  1. 행복은 우리 개개인의 내면에 있다.
  2. 무언가를 갖거나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억압하는 감정들을 우리 스스로 벗겨내는 것이다.

행복이 있는 곳에 두려움이 존재할 수 있을까?

펀셋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행복은 공포의 부재라고 말한다. 두려워하는 것은 정상일 뿐만 아니라 건강하기도 하다.

두려움은 우리에게 위험에 대해 경고하고 대비할 기회를 주는 감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그런 대비태세를 지나칠 때가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실제로 위협이 되지 않는 것을 너무 위험하다고 인식할 때 일어난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종의 심리적 갈등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우리를 믿게 만든 교육의 효과 때문이다.

어쨌든, 우리는 자신을 억압하고 행복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상상 속의 공포 무리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행복을 두려워하고, 행복을 엿볼 때 도망칠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두려워하기 때문에 자신을 제한한다. 우리는 어떤 긍정적인 경험도 거부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에게 가져올 수 있는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지우는 것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

행복은 두려움의 부재라고 말한 펀셋의 말이 옳았다. 주로, 상상 속의 공포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삶을 최대한으로 경험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줄 것이다.

또한, 우리의 존재를 표현하고 그것을 넘어설까 봐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감금하는 그러한 경직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에두아르도 펀셋은 누군가가 행복해지기를 원한다면 우선 자신의 두려움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정확히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왜 두려워하는 것인가? 이것들은 자신에게 완전히 솔직하다면 대답할 수 있는 간단한 질문들이다. 그것들은 심지어 당신이 직면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할 수도 있다.

두려움의 부재는 내면의 평화를 가져온다. 당신은 상상 속의 위험에 근거하여 인생을 결정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하며 어리석은 두려움을 자신감으로 대체해야 한다. 또한 모든 상황에서 당신이 흐르도록 도와줄 평화로운 느낌을 경험할 것이다. 날지 못하는 그런 일상의 공포를 어떻게 남겨둘 수 있겠는가? 그것은 또 다른 글의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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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Reguillo, R. (1998). Imaginarios globales, miedos locales: la construcción social del miedo en la ciudad. Ponencia presentada en el IV Encuentro de la Asociación Latinoamericana de Investigadores de la Comunicación. ALAIC.“Ciencias de la Comunicación: Identidades y Fronteras”. Universidad Católica de Pernambuco, Recife, Brasil,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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