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나누는 것은 대화를 통해서 한다

16 10월, 2017

사랑을 나누는 것은 대화를 통해서 한다. 단순히 말로 하는 대화가 아닌, 몸, 태도, 혀와 눈빛으로 하는 대화다…사랑처럼 강렬한 표현은 단순한 성적 행위에만 국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은 몸과 정신, 우리 영혼 모든 것을 통해 시를 쓰는 것이다. 이처럼 몸과 영혼을 융합해 사랑을 할 때 감정적 표현이 극대화가 되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누는 것은 대화를 통해서 한다

그렇다. 사랑을 나누는 것은 대화를 통해서 한다는 라칸(Lacan)의 말은 옳았다. 사랑은 육체적인 사랑이 다가 아니다. 눈빛, 그 자체, “너의 모든 것과 나의 모든 것”을 통해 애정과 미스터리와 갑작스러운 욕구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네 몸이 좋은 이유는 섹스 때문이다.

너와의 섹스가 좋은 이유는 네 입 때문이다.

네 입이 좋은 이유는 네 혀 때문이다.

네 혀가 좋은 이유는 네가 하는 말 때문이다.”

-훌리오 코르타사르(Julio Cortázar)-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

눈빛 뒤의 에로티시즘, 정신적인 옷 벗기의 전주곡

육체라는 경계를 에로틱한 눈빛이 꿰뚫기 전까지는 완전히 벌거벗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서로를 다양한 방법으로 유혹한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 교감하고 좋은 사랑으로 인해 나타나는 낙인 안에 갇힌다.

표현이 극대화가 가능한 단어들은 정신적 옷 벗기에 한 몫 한다. 아주 당연한 일이지만 적은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미 성 중심적 교육을 받은 사회에서 이 개념을 재도입하기란 쉽지 않다. 사회에서는 이미 우리가 성관계를 하면 사랑이라는 식으로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관계는 사랑의 일부일 뿐이다.

보통 이 사실은 뭔가가 부족하거나 단계를 건너뛰어서 뭔가가 이상하다고 느껴질 때 인식된다. 우리가 몸이나 눈빛이나 보살핌으로 대화하지 못할 때 말이다. 그러니 감정적 욕구에게 사과함으로써 우리는 대화의 극과 극에 서게 된다.

자전거를 타는 연인

우리는 마음을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몸이 저지른 실수를 믿어버린다. 이로 인해 전희가 30분 정도나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사실 몇 시간은 걸린다. 그럼에도 사랑을 이론화한다는 것은 특정한 사랑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개념 뒤에 있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로 모든 인정에는 독자가 독자적인 관점으로 확인(혹은 확인 안하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 뒤에 숨어있는 생각은 사랑과 섹스는 같지 않다는 점이다. 당연히 아니다. 적어도 사회가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그것은 절대 아니다. 섹스를 하는 것은 상대방의 피부를 사랑하는 것이지, 내면을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다. 적어도 진짜로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는 이 세상에서는 말이다.

열정적인 키스

가장 좋은 전희: 감정적 옷 벗기

멋진 라칸의 말을 다시 인용하자면, “사랑이란 존재 자체로 접근하는 것이다.” 만약 몸을 품기 전에 마음을 먼저 품는다면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우리부터 시작해야한다.

왜냐하면 예전에 말한 적이 있겠지만, 두 사람의 가장 친밀한 접촉은 성적인 것이 아니라 감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교감은 한쪽이 두려움을 이겨내고 반대편에서 그 사람을 인정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물론 달성하기 쉬운 목표는 아니다. 사실 감정적 옷 벗기는 엄청난 노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여기에는 감정을 듣고, 느끼고 포옹할 시간과 노력과 의지와 욕구가 들어간다.

포옹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우리의 감정을 아는 것, 즉 감정적 몸을 스캔하는 것은 두려움, 갈등, 불안감, 달성, 교훈 등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 필수적이다.

진정으로 사랑할 때 감정적 철학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취약점을 알 때, 어떤 것이 우리를 위협하고 어떤 것이 번영하게 만드는지 알 때.

그렇기에 눈빛, 말투, 보살핌 혹은 애정을 통해 비춰지는 본인의 모습에 신경을 써야한다. 이렇게 사랑이 이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