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마지막 업데이트: 30 6월, 2018

인생에서 가장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토록 어렵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언젠가 모두 죽는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이다. 그 누구도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우리는 인생의 좋은 부분을 살아가며 이 사실을 무시하거나 피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과 관련된 모든 생각이나 대화를 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이랬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에서 죽음이란 일상적인 것이었다. 파라오와 귀족은 물론 그들의 노예들도 죽음을 준비하며 인생의 좋은 부분을 보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주로 자신의 화려한 무덤을 죽기 훨씬 전부터 고안하기도 했다. 그들은 육체적 죽음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믿지 않았다.

“죽음을 생각하며 잠이 들고, 그 생각으로 깨어나기에 인생은 짧다.”
-속담-

고대 로마 사람들 역시 그들이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말해주는 전통이 하나 있었다. 위대한 장군이 전쟁의 승리를 거두면, 그들은 영광의 주인공이 되어 도시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의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그들 뒤에는 그의 귀에 이 말을 반복하며 따라오는 한 명의 노예가 있었다: “메멘토 모리.” 이 말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의미이다. 죽음의 순간을 서두르고 싶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죽음으로부터 탈출하게 해줄 만큼 위대한 승리란 없다는 것을 승리한 장군에게 상기 시켜주려던 것이다.

열망과 목적으로서의 죽음

중세 시대는 최소한 서양에서는 종교적 반계몽주의 시대였다. 세상은 신의 창조물이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신의 논리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았다. 죽음이란 신과 만나기 위한 하나의 단계였다. 육체적 삶은 단지 그 완벽하고 영원한 존재에게 가기 위한 서곡과 같은 것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그 시대를 진정으로 사로잡은 하나의 글은 산타 테레사 드 아빌라의 “vivo sin vivir en mi: 사노라 내 안에 아니 살며” 이다. 첫 번째 구절은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살지 않으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나는 희망한다

나는 죽지 않으므로 나는 죽는다”

이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욕망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인간이 삶에 끝이 존재한다는 믿음의 불가능성 또한 이 시에는 담겨있다. 어떤 식으로 표현되건, 죽음이라는 현실은 온전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죽음이 이야기되어야 하고, 기억되어야 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 설명으로써 주어졌고,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현대 시대에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의 어려움

과학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사람들의 상상의 많은 부분을 실망 시켰다. 그 진실 중 어떤 것은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거부 당하고 있다. 현대성은 과학의 새로운 꽃을 피웠다. 이 시대 과학의 시작점에 있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해부를 시행하기도 했다. 이것으로 인해 죽음과 함께 였던 신성한 후광이 깨지기 시작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상화와 육체도

그리고 죽음과 싸우기 시작한 위대한 의사와 과학자들이 나타났다. 이것은 종교적이 아닌 과학적인 문제가 되었다. 게다가, 이 새로운 지식의 한 가지 목표는 삶을 연장하는 것이고, 그것은 이제 굉장히 좋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인간이 진화된 포유류라는 것과,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생물학적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상가들은 처음으로 신과 육체적 삶 이후에 있을 무언가에 대한 믿음을 멈추었다. 이것을 표현하고, 인생의 심각한 불만을 배신하는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났다. 허무주의와 실존주의가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실망과 비판의 중간적인 태도를 취했다.

오늘날 죽음을 마주한다는 것

산업 혁명은 대규모 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사람들에게 한계가 없다는 감각을 가지게 했다. 과거의 종결이 선언되었고, 전례 없는 기술적 혁명이 일어났다. 단계적으로 우리는 짧은 생애주기, 일회용의 세계에 돌입했다… 짧은 생명의 순환, 그것은 또 다른 시작을 위한 끝일 뿐이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희석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불안 요소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란 주제를 생각하던 시간은 거의 전부 일을 하는 것으로 채워졌다. 계속되는 일상은 우리가 다음 시간을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생각할 시간을 거의 주지 않았고, 죽음이라는 주제는 그저 방치되었다. 마치 죽음이 덜 현실적인, 비극적인 놀라움이 된 것이다.

눈동자 사진

가장 심해진 것은 죽음에 대한 거부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죽음이 찾아오면, 그것에 비통함을 보이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들은 재빨리 죽음을 잊으려 한다. 최대한 빨리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다. 항상 하던 걱정들로 돌아간다. 마치 죽음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아니면 최소한 그것이 자신에게서는 먼 이야기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무엇인가? 왜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답변은 우리 대부분의 뒤에 숨어있는 우울과 불안 속에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는 결국 끝이 있다는 더 커다란 자각을 가진다면, 이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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